千秋世印
千秋夜話
어떤 기다림
W. 잉차(@inokisbest)
푸드득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퍼졌다. 장막이 깨진 수면처럼 넓게 퍼지다가도 한순간에 소리마저 흡수하는 고요한 초목의 땅. 빽빽한 나무로 해가 드는 곳과 들지 않는 곳이 확연히 구분되는 이곳은 신선 아홉이 등선했다는 전설로 몸살을 앓는 천산이다.
[또 노목님께 다녀왔단 말이야?]
[앉아만 있으면 세상 구경거리가 알아서 걸어오는데 안 갈 수 있나]
[그러다 사형께 혼구녕난다. 이번에 걸리면 진짜 쫓겨날지도 몰라]
[아 구경 좀 하는 게 어떻다고 난리야]
[위험하니까 그렇지!]
마지막 등선자는 삼백여년 전. 흔히 잊힌 옛것들 사이에 남은 것은 더욱 반짝인다. 반짝임은 현혹되는 것. 이제는 옛일일 뿐이라면서도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웬만한 사람들은 초입에서 걸러지고 제대로 방향을 잡아도 맹수와 지형의 장난으로 꽃 모가지처럼 생이 진다. 그럼에도 두 손의 마지막 손가락은 제가 될 거라는 열망은 뿌리를 잃지 않았다. 어설픈 나뭇가지 움막이 비를 피하는 지붕을 얹고 새로운 생명마저 낳자 어느새 군락을 이룬 마을이 들어섰다. 네 걸음 차이로 아이를 잃은 부모가 금기의 구역을 만들고 울타리와 진을 쳐두어도 그러했다. 때문에 이 산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적을 두고 있었다.
긴 다리가 팟! 하고 발등을 밟자 명이 꽥! 하는 소리를 내며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뒷다리가 짧아서 높이뛰기는 젬병이라더니 다 거짓부렁이었네 뭐!
[평이 너! 아프잖아!!]
[그럼 아프라고 밟지 간지러우라고 밟았을까봐?]
[아 거 너무하네!]
[내가 그제도 사형한테 혼난 거 알아 몰라?]
[모른다 뭐!]
순간 움찔한 게 다 보였음에도 명은 모른다고 빽 소리를 지른다. 평이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흰눈을 뜨고 점점 다가가는데 명은 슬금 뒷걸음질치다 단숨에 저 멀리 달려가 버린다.
[야!! 아휴 내가 못 살아. 또 내가 혼날 거야. 이번에도 나만 혼날 거라고!]
평이 명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야!!! 하는 소리를 냈다가 화들짝 놀라서는 그보다는 작게 신세 한탄으로 앞발을 동동 굴렀다. 왕사형의 길고 긴 잔소리가 어떤 건지 저도 알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평은 한 치만 한 깊이의 구덩이가 파지도록 성을 내며 눈알을 굴리다 명과 반대 방향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나도 몰라. 명이 때문에 혼나나, 내가 잘못해서 혼나나 그게 그거지 뭐! 숱한 대신혼에 단단히 토라진 평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매끈한 갈색의 털이 나뭇잎 사이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얏!]
이 가시덤불 길은 눈 감고도 다니던 곳이었는데. 오랜만의 걸음이라 그런지 더 빽빽해진 때문에 평은 아야, 아야 소리를 몇 번이나 내고서 덤불을 빠져나왔다. 몸이 커진 건가? 왕사형의 기다란 머리 뿔을 뛰어넘어 벌써 다 자랐단 말을 듣고도 다니던 길이었으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아야! 이번엔 진짜 아팠어! 마지막까지 찔러댄다고 궁시렁궁시렁 아픈 곳을 삭삭 핥던 평은 달덩이만 한 빛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한낮에 맞은 밤처럼 어둠을 닮은 나무 그림자 속에 덩그런한 빛은 반갑기도 하고 떨리기도 한다.
[...나가진 않을 거니까!]
평은 하하! 아무렇지도 않은 웃음소리까지 내고선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톡 튀어나온 코 때문에 양쪽 눈 대신 옆으로 서서 한쪽 눈으로 빛 너머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빨간 꽃집 아인가? 엄청 길쭉해졌네]
긴 목을 쭈욱 빼내고 까만 눈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마당 한 편에 소담한 붉은 꽃이 있는 집에 살던 아이가 분명했다. 나뭇가지 색깔의 머리카락과 불그스름한 뺨, 조잘조잘 떠들기는 엄청 떠드는데 입은 참새 부리만큼 작은 여자아이다. 매일 건너편 집 남자아이와 뛰어다니느라 바쁘더니 이제는 찰싹 붙어있다. 짝을 맺은 건가? 찾아오지 않던 시간 동안 변한 거겠지. 평의 눈은 더 넓은 세상을 훑는다.
저기 언덕배기에 있는 작은 집은 낳는 아이마다 사내아이라 부인의 속곳이 성할 일 없던 곳이다. 매일 도둑으로 말썽이라 아이 몇이 돌아가며 문간을 지켜 섰었는데 아이들이 커서 그런 건가, 이제는 휑하니 아무것도 없다. 눈썹까지 하얗게 세 마당 한 바퀴 도는 게 하루의 가장 큰 일과였던 할아버지가 살던 집도 기척이 없고, 한참을 지나야 하지만 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옆집은 아마 새 가족이 들었나 보다. 조금만 더 크면 숲 안에서도 들리겠네. 빽빽 울어대는 아기 소리가 아주 장하다. 그리고 또 옆집은…….
짐승의 사체가 주렁주렁 매달렸던 줄이 눈에 들자 목덜미가 스산해진다. 이제 보이는 건 높다랗게 쌓인 장작 뿐인데 평의 가슴은 마구 뛰어대기 시작한다. 평이 피한 후부터는 숲에서도 보지 못했다. 일부러 멀리 나무하러 가는 건가? 평은 어쩐지 마음이 아파 큰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았다. 보고 싶기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것과 똑같이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가 묵직하고 텁텁해진다. 평은 저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다른 익숙함을 향했다.
[강님 오랜만이에요]
이럴 때 평은 마치 어떤 법칙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이 강을 찾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고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또한 알 수 없는 이 한없이 넓고 아름다운 강을. 먼 곳의 아련한 향과 하늘에서 뿌리는 햇살을 벅차게 비춰내는 맑은 물빛 향연에 평은 다리를 굽혀 앉고 옅게 돋아난 풀에 아이처럼 머리를 부볐다.
[강님보다 곱절은 오랜만인 사람을 보았지 뭐예요]
사실은 명이 그렇게 노목님을 찾아가는 이유가 있다. 노목님은 마을에서 숲으로 들어오는 가장 큰길에 자리하고 오래, 아주 오랫동안 살아오신 원천님이다. 깊은 뿌리는 숲과 산 전체에 닿아있고 내내 푸른 잎은 세찬 빗줄기도 뚫을 수 없다. 그런 노목님 곁은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숲 밖의 소식이 한꺼번에 들려오고, 또 찾아오는 것이다. 명과 평은 숲 바깥나들이를 가장 좋아하던 죽마고우였다. 열에 가까운 동족들이 죽기 전까지는, 하루가 멀다 했다.
인간이 가까워지고 출입이 생기면서 사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동물은 없었다. 그러나 숲의 험준함이 비할 데 없었으므로 평과 명은 인간의 사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숲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 것, 민가에 출입하지 말 것 등등의 잔소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잔인한 면모, 칼날보다 잔혹한 살기를 직접 마주한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인간은 무서워지고 소중한 이들은 삶을 잃었다. 바깥세상은 말 그대로 밖이 되었다. 안일했던 대가는 그렇게나 컸다.
[잘… 지내겠죠?]
모든 인간이 그와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평이 살아온 나날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뒤늦게 참담한 현장을 바라본 귀에 들린 목소리가 알려준다. 이렇게 터전 가까이 온 인간은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도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나 닿을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상하고 슬픈 그 날의 모든 순간은 눈과 귀로 파고들어 머릿속에 새겨진 듯했다.
'몰살할 참이오? 그만두지 않으면 손을 쓰겠소.'
싸늘한 고요를 부른 청아한 울림.
평은 한순간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
날붙이를 든 사냥꾼의 손이 떨렸다. 곧 기세에 휩쓸려 죽은 어린놈마저 무언가에 둘둘 말아 끈으로 엮였다. 욕심을 부린 만큼 끔찍하게 느린 속도로 아주 천천히, 바닥에 새로 돋은 풀잎마저 살생의 무게로 모조리 짓누르고 핏길을 낸다. 그르륵 그르륵 끌려가는 소리가 바늘이 되어 온몸에 꽂힌다. 평은 바닥에 스민 자국만큼 눈물을 쏟았다.
자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몰래 바깥을 나간 건 마음이 답답해서였다. 어딜 가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존재했다. 살이 베이고 뼈가 잘려 나가던, 불시에 치명상을 입고 숨이 턱하니 막혀 울부짖던 처절한 울음. 누구나 침울하고 누구나 슬펐으며 누구나 화를 냈다. 어쩌면 인간에게 뒤를 밟혀 길을 일러줬을지도 모르는데 탓하지 않는 모두에게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매일 오가던 거리에, 함께 도란 하던 웃음에, 뿔 자란 높이에 붙여놓은 송진에, 화를 내고 코를 부비던 선명함에 고통을 덧씌우고 싶지 않았다. 다리의 짐을 풀고 숲의 끝. 누군가 자세히 본다면 볼 수 있겠지만 굳이 시야에 들지 않는 그늘에서 오래 함께였던 것들을 보았다. 밝은 해와 부는 바람이 그런 것처럼 제 구역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딱 하나, 줄에 주렁주렁 매달린 친지들과 그걸 바라볼 수 없는 평 자신 뿐이었다.
[나무꾼님 말이에요]
명은 사냥꾼 하나 때문에 인간 모두를 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고 했다. 평의 생각도 같았다. 다만 명이 그걸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했다면 평은 숲의 가장자리에서 나무를 하는 나무꾼에게서 확신을 얻었다.
'이제 사냥꾼은 없다. 내가 쫒아버렸거든'
멀찍이서 나무 얹는 모습을 바라봤을 뿐인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사람에게서 말이 들려왔다. 고개만 돌리려고 하면 도망갔던 몇 번의 일들이 떠올랐다. 평은 저가 어떠한 마음을 가졌는지 돌아볼 새 없이 똑같이 날붙이를 든 인간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마침내 나뭇짐 뒤로 반만큼의 얼굴을 내밀었을 때,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것이 무색하게 툭하니 머리에 얹어져 길쭉한 다섯 개의 손가락만 제멋대로 움직였다. 꾹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털을 모아 쓰다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내는 몇 번이나 목덜미까지 슥슥 쓸어내렸다. 자연스럽게 올려다본 나무꾼의 얼굴 너머에서 햇살이 넘실거렸다.
그 후로 나무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도 애써 고요해진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굳이 찾지 않았다. 웬일이냐는 왕사형의 따뜻한 눈빛은 잠깐이고 명이도 그렇게 좀 만들어보라며 금세 잔소리로 변해버렸지만 사형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때의 일로 왕사형은 부모님과 부인까지 잃었다. 하나뿐인 아이는 유달리 명을 따라서 자꾸만 바깥세상에 눈과 귀를 두려 했다.
오래 벌건 상처는 아물 듯 아물지 않았다. 자주 잊어 드물게 기억하거나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평도 알았다. 명은 익숙해지려는 것 같은데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평은 그래서 강님께도 오랜만이었다.
물과 풀, 하늘의 냄새를 모두 실은 바람이 콧잔등을 스친다. 평은 자꾸만 가물해지는 눈을 뜨려 애썼지만 오랜만에 달음박치던 가슴이 평을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듯했다. 짧은 힘겨루기이나 눈꺼풀에게 이겨본 적 없는 평은 순순히 어둠을 딛고 잠의 세계로 향했다. 좀 더 따뜻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달콤한 오수였다.
-
'너는 여전히 그 얼굴을 좋아하는구나'
어딘가 아련한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몽롱하여 뿌연 정신과 달리 눈은 스르륵 잘도 떠진다.
[혹시...]
'...혹시?'
평은 인간을 좋아했다. 그들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모양새는 쳐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다. 잠이 가시지 않은 눈을 찡그려서라도 번쩍 뜨게 한, 이렇게 완벽한 모양새의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정오의 가장 찬란한 물결을 입은 검은 머리칼과 밤하늘을 옮겨온 눈동자, 모든 것이 빛나게 하는 피부에 모양 좋은 붉은 입술까지.
[강님...]
평에게서 홀린 듯한 음성이 흐르자 남자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좀 전의 밋밋한 무언가가 깨어진 것도 같은 순간적인 변화에 평은 깜박깜박 빠르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특하구나. 나를 알아보다니'
[!!!]
'내 너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왔다. 마음이 착해 내릴 것이니 소원을 말해보아라'
[소원…이요?]
'그래, 소원. 네가 말하는 어떤 것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
대지에 스미는 음성이 진동한다. 잔잔하던 강의 수면은 잔물결로 일렁였고, 딛고 선 바닥의 풀들은 일제히 몸을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의미 없던 풍경이 더불어 아름다움을 입은 순간, 멍하니 간지러운 경배를 받던 평은 일어서는 것도 잊었던 다리를 펴고 한발 한발 '강님'께 다가섰다.
[명이의...]
'죽은 것은 되돌리는 게 아니다'
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님의 답이 돌아왔다.
'새로운 인연을 이을 수 있는 건 산 것들만 할 수 있다'
평은 물끄러미 강님을 올려다보았다. 엄한 목소리라 얼굴도 그럴 줄 알았는데 처음만큼, 아니 처음보다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평과 눈을 맞춰왔다. 뭐든지라고 하셨으면서.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강님의 눈에서 절대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읽어낼 수 있다. 그래도, 그래도 조금만 더 투정을 부려볼까. 그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는데.
[갑자기 물으셔서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이지'
[음… 아! 그러면 나무꾼님께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드리고 싶어요!]
평은 아주 명랑한 목소리로 강님을 향해 티 없이 웃었다. 진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매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해야 하나 싶은 참이었다. 그래도 강님이 직접 들어주시는 건데 좀 더 의미 있게 쓰고 싶었던 평에겐 몹시 기분 좋은 발견이었다. 평이 지금까지 겪어온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친애하는 이들의 죽음. 그들을 되돌릴 수 없다면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나무꾼?'
[네. 나무꾼님께요]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좋은 일이라면 어떤 일을 이름이냐?'
[혼자이신 것 같으니 가족을 만들 수 있게 해드리면 어떨까요?]
모두가 가족을 이루고 산다. 평이 알고 있는 한은 그랬다. 평은 아주 오래전에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분들을 대신해 다른 어른들이 평을 키워주었다.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들이 먼저인 정도의 차별은 받았지만 전혀 불만스럽지 않았다. 그저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애정이 아닌가.
'소원은 하나뿐이다. 정녕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쓸 것이냐?'
[예. 저도 맛난 밥만 먹고 짝지어 살고 싶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네가 할 수 있다'
[노목님을 따라 기슭을 올라가면 더 맛있는 풀이 있어요. 짝은 솔직히 자신 없지만요]
뒷말을 읊조리는 강님을 바라보는 평의 표정은 꽤나 다부졌다. 평이 말한 길은 좁고 높으며 위태로운 곳이다. 그렇지만 아주 신선하고 향긋하다. 그래서 종종 명과 걸음을 나서곤 하는데 다녀온 걸 들키면 사형은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냐고 발을 쿵쿵 구른다. 동시에 엄청난 잔소리를 하려 하지만 물어온 걸 입에 넣어주면 대번에 우물우물, 그래도 가지 말라면 좀 가지 마. 싹싹 챙겨 먹으며 구시렁대는 모습이 퍽 웃겨서 재밌기도 했다.
'이건 인연을 강제하는 일이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많이 어려운 일인가요?]
강제?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평이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냥 말만 하면 될 것처럼 하시더니 그게 아니잖아?
'글쎄. 네 마음에 달려 있겠지'
내 마음까지? 이것 참. 저렇게 반짝거려서 그런가? 왜 이렇게 어렵게만 말하는 거야?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입이 나온 평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숙여 뿔 끝으로 강님의 배를 찔렀다.
[아프긴 하지만 이런 걸 달라고 하면 드릴 수 있어요. 전에 마을에 사는 아이한테 줘봤는데 진짜 아팠거든요. 그치만 강님이면 그렇게 돌로 막 찍어서 떼가실 건… 아니잖아요?]
혹시라도 그렇다고 할까 말끝을 늘인 평은 잔뜩 불쌍한 표정이 되었다.
[며칠 굶으라면 그럴 수도 있고 노목님 반대 골짜기 절벽에 핀 꽃을 따오래도 따올 수 있어요. 하지만 저 말고 명이나 왕사형의 뿔을 드리거나 그들이 먹을 풀을 드릴 수는 없어요. …대답이, 되나요?]
'충분하진 않구나. 그렇지만 네 뜻은 알아듣겠다'
강님은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새벽이슬을 맞은 어린 풀보다도 반짝여 그만 입에 넣어보고 싶어지는 그것을 흉하게 잘려 나간 뿔 끝에 감는다. 머리카락은 저절로 오므라져 끝이 사라지더니 단단히 얽힌다. 무언가 스미는 듯한 느낌 뒤엔 미약한 열이 올랐다.
'이것은 증표다. 이 증표로 너에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달이 가장 높을 시간에 무리가 지면 선녀들이 내려와 수욕할 것이다. 물에 들어가거든 옷 하나를 감추어라. 그러면 오갈 데 없는 선녀는 나무꾼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녀님의… 옷을요…?]
'이것은 하늘의 비밀. 너는 마땅히 들은 값을 해야 할 것이다'
강님의 음성은 평이하게 단조로웠지만 천둥처럼 커다랬다. 평은 기세의 무게에 홉뜬 눈을 잠시동안 감지도 못했다. 선녀님이랑 인연을 맺어주신다고? 그것도 옷을 감춰서?
'네가 할 일을 한다면 모든 일은 순리처럼 풀릴 것이다'
왜 '강님'으로 부르게 되는지 알겠어. 강님의 얼굴이 처음으로 무서워 보였다. 어째서 지금에 와 저런 얼굴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의 마음은 늦가을을 몰아내는 겨울바람 광기에 닿은 듯 덜컹거렸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 맺힌 북풍한설이 마음을 꽁꽁 얼리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평은 멍한 정신을 다잡느라 넋 놓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상한 꿈도 다 있구나, 했다. 목축이고 정신이나 차리자 싶어 맑은 물을 연거푸 마시고 헉헉거리는데 시원한 물을 준 강은 이걸 좀 보라며 검게 변한 뿔을 떡하니 비춰준 것이다.
이래서 증표라고 하신 건가? 잊어버리지 말라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자신은 들은 값을 해야 하는데 그게 좋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다. 왜 자신의 소원이 곧게 닿지 못하고 구불구불 나무뿌리처럼 강님께 닿았는지 평은 속이 상한다.
[강님…]
한 번 더 저랑 이야기해 주시면 안 돼요? 들어주셨으면 하는 말이 있어요…. 아주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강님을 애타게 불러봤지만 평은 물가에 덩그러니 혼자였다. 그게 서러운지 자꾸만 마음이 아파서 저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평소엔 느껴지지도 않던 시간이 장히도 빨라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평의 가슴은 내내 더 심한 고동을 일으켜 이젠 찌릿찌릿 아플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이 일을 어떡하냐고!]
명의 발을 밟을 때나 동당거리던 다리가 저절로 그리된다. 입안은 온통 흙이 들어찬 것처럼 퍽퍽한데 물을 마시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초조함이 절정을 찍는 그때, 어디선가 왁자한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헉!]
평은 저도 모르게 엄청난 속도로 다리를 움직여 바위 뒤로 숨었다. 과연 강님의 말씀처럼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옷을 벗고 강에 몸을 담근다.
정말, 정말이었어. 정말 선녀님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강님의 말을 믿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어렴풋한 상상이었을 뿐이다. 그런 하늘의 존재가 눈에 닿는 건 어떤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이 가진 고고한 기백이 온몸에 닿아 심장이 콩닥거릴 뿐이다.
선녀들에게 눈을 빼앗긴 평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들을 견주어 본다. 와아, 강님 옷이랑 거의 비슷해. 헉, 저 선녀님 혹시 뿔 난 거야? 선녀님들도 머리에 뿔을 갖고 계시나? 아, 뿔이 아니라 머리카락인가봐 새카만 걸 푸르니까 강님이랑 똑같네. 예쁘다…. 저 선녀님은 눈동자가 강님이랑 똑같아. 근데 몸을 담그기엔 물이 너무 차지 않나? …웃으시는 걸 보니까 그렇진 않은가봐. 그래, 그러니까 수욕도 하시겠지. 근데 내가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평은 나뭇잎 색을 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운 옷 하나를 입에 물었다. 이걸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종일 혹사당한 심장이 또 아파오기 시작한다. 어디에? 어떻게? 으으 갑자기 머리까지 너무 아파져서 평은 바위에 머리를 쿵 찧고는 입에 문 걸 질겅질겅 씹었다. 갈길을 잃은 중생의 어쩌지 못한 모를 행동이었다.
'어머 그건 먹는 거 아니야'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넋 놓은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평이 번쩍 고개를 들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의 여인이 아는 체를 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당연히 입에 물린 옷자락. 평은 사색이 되어 우물우물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할 소리로 [죄송해요!]를 외치고 쌩하니 숲 안쪽으로 도망쳤다.
'그건 놓고 가야지!!'
저걸 대체 어떻게 씹었냐는 둥, 제일 중요한 대대를 가져갔다는 둥의 소리는 평의 귀에 닿지 못했다. 쌩하니 달리는 것에만, 강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모든 것을 망쳤다는 생각만이 평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뿌연 시야가 기어코 눈을 흐리게 하자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결국 앞다리가 꺾이고 어딘가로 추락하는 동안 평은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아는 얼굴들이 각자의 추억을 가지고 하나씩 떠올라 빛처럼 명멸한다.
[악!!]
정신을 빼놓고 몸을 내던지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닿았을 땐 견디기 힘든 통증이 찾아왔다. 무언가가 깊히 박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볼 뿐.
아프다. 등도, 다리도, 눈도, 그냥 전부 다 아픈데 흙에서 구르던 소리가 질질 끌려가던 소리와는 달라서…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널브러져 별님을 드문드문 품은 하늘을 보며 평은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가, 머리가 이상한 생각을 하잖아. 평의 눈에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까지 일을 망쳐놓고 다행이란 생각은 차마 하고 싶지 않았다.
-
'여기서 뭘 하는 게냐?'
밤새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 자국이 선명한 평이 한참 깊은 구덩이에서 숨만 쉬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다친 게로군. 강님은 평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직접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 평을 안아 올렸다.
[윽]
'다쳤구나.'
[죄송해요 강님…]
얼굴에 쏟아진 흙더미도 그대로 두었는지 고여있던 눈물과 툭툭 떨어져 내린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구른 탓에 곧고 예쁘던 다리가 온통 생채기였다. 뿐 아니라 튀어나온 돌부리에 찍힌 등이 엉망이었다.
'너는 하는 짓도 다치는 것도 어쩜 이리 한결같으냐.'
금세 따뜻하고 푹신한 어딘가에 뉘어진 평은 다친 곳을 매만지는 보드라운 손길에 움찔움찔 떨었다.
'문평아, 나를 원망하느냐?'
평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평은 자신이 왜 이렇게 우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저 목울대가 아프고 콧잔등이 시큰해 자꾸만 그렇게 되었다. 강님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생채기는 사라지고 축 처졌던 기운이 차올라 눈에 생기가 드는데도 아픔이 전혀 가신 것 같지 않았다.
[강님은 이런 것도 하실 수 있으세요?]
'물속에 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물 속이요? 그럼 강님은 평소엔 어디에서 쉬세요?]
'지금 네가 보고 있지 않누.'
지금? 평은 휘적휘적 고개를 저어가며 사방을 둘러보다 몸을 일으켰다. 다친 곳이 많이 아팠던 터라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기합까지 넣었는데 그것이 무색하게 몸은 이제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억지로 나아지게 하려던 기분이 저절로 나아가자 평은 총총거리며 이곳저곳을 기웃댔다. 넓은 것 같으면서 좁고 좁은 것 같으면서 넓은 이상한 공간. 조금 어두운 곳곳을 평은 한발 한발 제 걸음으로 걸으며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런 평을 강님은 한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쫑긋대는 귀를, 유난히 까만 눈동자를, 길게 뻗은 다리를, 한 손에 꽉 쥐고 싶은 꼬리를,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짙은 갈빛의 평을.
[뭍이랑 닮은 게 별로 없어요]
숲 가까운 마을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라서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기와를 얹고 사는 집이 없다. 때문에 사치품은 없다시피 하다. 지금껏 버리지 못한 이 오래된 것들이 '평'에게 낯설 것이리라.
[강님]
'운강이라 한다.'
[예?]
'너도 나를 그리 불렀었지.'
몸을 굽혀야만 제대로 시야가 맞는 이에게 다리를 꺾으며 강님, 운강이 말했다. 평은 강님의 말을 못알아들은 게 더 많았으므로 되묻지 않으려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운강...님?]
'그래.'
뻗은 손이 평의 이마에 닿자 평은 어쩌지 못하고 몸을 뒤챘다. 자꾸 이상한 마음이 들어와 평의 마음과 머리를 혼란하게 했다. 홀로 구덩이에서 하늘만 보고 있었을 때와는 또 다른,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해 평은 기어코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선녀와 나무꾼은 잘 만났다.'
[아…]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은 지금 이곳에 모두 있다.'
운강은 뒤채는 아이에게서 손을 거뒀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이건 가혹하겠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서둘러서 무얼 할 수 있다고. 운강이 마음을 잠재울수록 평의 신음 또한 자취를 감추었으나 마음에 피어난 소용돌이마저 감춰진 건 아니었다. 친절하지 않은 설명이 나은 것 같다가도 역시 답답하다. 평은 다시 운강님을 향해 제 표정을 온전히 내비쳤으나 돌아오는 것은 부드러운 손길과 생전 처음 먹어보는 풀잎이었다. 노목님을 따른 험한 길 끝에서 먹어본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었다.
-
[그럼 이분을 못 본 게 삼백 년이 넘었단 말씀이세요?]
'글쎄 그 후로는 헤아리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평이 운강님을 올려다보다 제 코끝으로 손등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는 눈은 그림에, 손은 평의 머리에 두고 옅게 웃었다. 어쩐지 평의 마음은 이곳에 온 뒤로 자주 찌릿거렸다.
한쪽 벽 정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살짝 휜 입매가 운강님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미소다. 어렴풋했지만 누구냐는 질문을 백 번쯤 한 뒤에야 듣게 된 사람은 어쩐지 낯설고도 친숙하다. 계속 신경이 쓰여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기어코 대답을 들어내고 말 만큼 호기심이 일었다.
'생긴 건 평범한 사내인데 어쩐지 처음부터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이였지. 평소라면 금세 잊었을 잡초가 함께 지내다 난초가 되었다.'
'머리 쓰는 걸 그리 귀찮아하면서도 계속 말하면 듣는 척만 하다가 어느새 더듬더듬 아이처럼 따라오는 애련스러운 이였다.'
'그래도 손을 쓰는 것은 몇십 년이 지나도 늘지 않아서 검 쓰는 일 말고는 과일도 잘게 조각내어 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알게 된 저 남자의 이름은 '석문평'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지만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풀이 죽다가 울컥 기분도 상했다. 어쩌서인지 운강님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애처럼 굴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은 잠깐이고 운강님이 정말 듣고 싶냐고 물으면 격렬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면 운강님은 커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무릎에 평이 고개를 얹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게 신호가 되면 저 깊은 운강님의 기억 속에서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이의 모습이 딸려 나왔다. 어떤 날은 무인으로서 열심히 수련을 하고 어떤 날은 정인으로서 사랑스러워지는 남자의 머릿결이 만져질 듯했다.
[운강님은요?]
[운강님이 궁금해요]
어느 날이었다. 물속의 시간은 어쩐지 조금 빠른 것 같다고 느끼던 평은 일상처럼 추억하는 운강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정인을 다디달게 풀어내는 그의 모습은 함께 기뻤을 뿐 아니라 마치 그린 듯해서 들을수록 빠져들었다.
중독적인 시간에 빨려들다 문득 반대의 입장이 궁금해졌다. 석문평이라는 사람에게 저분은 어떻게 보였을까. 서로 많이 사랑했다니까 비슷하게 달콤한 모습이 나오겠지만 상상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까맣게 버석거렸다. 그을음을 없애고 사이사이를 알아내고 싶었다. 평은 운강님이, 그가 궁금해졌다.
'또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는구나.'
[왜 쓸데없는 건가요?]
평의 질문은 운강의 목소리를 뚝 끊기게 만들었다. 검은 눈동자에 단단하게 힘을 주고 왜냐고 되받아치는 평에게 운강은 덧붙일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생에 일부러 말을 그만둔 적은 있어도 말문이 막힌 적은 처음이나 다름 없어서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해줄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구나]
머리통에 올라있던 커다란 손이 턱 사이로 들어와 얹어져 있던 걸 들어 올린다. 일정한 거리의 눈길은 서로 다른 고집을 피우며 어우러지지 못하다 온도만 올린다. 평은 백번쯤 묻던 경험을 살려 나름대로 고집을 피워봤지만 운강은 단호한 거절과 관용적인 미소를 적당히 섞어 아주 잘 빠져나갔다.
잔뜩 약이 오른 평은 하루종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골몰했다. 할 수 있는 게 너무 한정적이라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큰 문제였다. 하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시위도 해보고 뭐든 다 모조리 무시한 체 벽만 보고 있어도 봤지만 운강님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운강님이 유려하게 관심을 돌려놓으면 두 배로 화가 나는 것이다. 듣고 말겠어! 뚱한 침묵을 잇던 평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을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나흘까지. 여전한 태도를 유지하던 운강님이 이불을 걷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는 것을'
'말로 해서는 며칠이 걸릴 테지'
운강님의 음성은 귀로 듣되 내, 외부의 모든 곳으로 스민다. 무게에 따라 심장을 쿵, 떨어뜨릴 때도 있고 눈꺼풀을 시큰하게 할 때도 있다. 지금은 아주 가볍게 떨어져 놓고는 꽈악 옥죄는 것 같다. 이러니 더욱 모르겠다. 이 고집이 크게 잘못한 것일까? 나는 왜 고집을 부리고 싶었을까? 평에게서 포옥 한숨이 나자 운강님의 손이 평에게 닿는다.
스윽 눈가를 덮은 손에서 포근한 향이 난다. 마치 가을 정오의 볕 같은 은은함이 갖은 척을 힘들게 한다. 토라진 척이 해제되고 누운 자세가 편안해지자 눈을 마주 보는 대신 꿈의 세계로 초대된다. 아주, 아주 깊은 밤이 될 터였다.
백운강, 또는 혁련상. 그는 슬픈 과거를 가졌으나 능히 천지사방에 이름을 떨친 고금 제일의 남자로 천마라는 칭호가 넘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하늘에서는 그의 능력을 탐내 우화등선하기를 기다렸으나 인간으로서의 삶에 안주해버리자 타고난 명을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죽어 불려온 곳에서 그는 뻣뻣한 태도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벌을 받아 강에 유폐되었다.
''하늘에 종속될 이로 마땅히 가진바 헌신해야 하거늘, 인간 하나 때문에 나의 청까지 뿌리친단 말이냐!''
죽은 후가 있다면 마땅히 문평과 함께할 것을 꿈꿨던 운강으로서는 저런 말 따위 당연히 헛소리였다. 사후세계를 신봉하던 이는 아니었으나 도착한 곳이 익히 알만한 세계인데 혼자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에 남는다면 문평이 덕을 쌓아 입성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처럼 무난하게 사는 이에게, 윤회의 삶 어드메에 쌓길 기다리라고? 쌓을 수 있다손 쳐도 남과 엮여 살부비고 사는 걸 지켜만 보라고? 석문평 인생에 관여할 수 없는 백운강? 그따위 미련한 짓은 할 생각도 필요도 없다. 말년에 좀 쉬긴 했지만 한평생을 일하느라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또 일까지 하라니 어느 쪽도 딱 질색이었다.
''네 짧은 식견으로 그 인간은 보장된 윤회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운강의 의견이 도통 꺾이지 않자 불똥은 문평에게 튀었다. 이것은 아무리 염라라 해도 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으로 까탈스러울 게 분명했으나 노기로 하늘을 찢을 듯한 분기탱천이 당장이라도 모든 뜻을 이룰 듯했다.
기어코는 갈라진 땅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솟았다. 정확하게 운강을 짚은 불은 그간 네 발칙함을 곱씹으라며 까마득한 어둠으로 운강을 내던졌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느낌마저 고요한 추락과 어느새 제 색을 잃고 새카맣게 타오르는 불씨. 생전 겪은 것과 닮은 것은 찾을 수 없는 혼란 속에 운강은 물속으로 빨려들었다. 전신에, 심지어 머리카락 끝까지 고통으로 잠긴 듯했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죽음이 있다면 이와 같으리. 한참을 의식과 씨름하던 운강이 기가막혀 자조했다. 통증도 통증이거니와 얼음장같은 사방이 혼절의 안식조차 주지 않았다. 인간의 삶을 벗어난 몸은 배고픔도, 잠도 찾아오지 않는데 낫지 않는 화상과 추위, 그로인해 더 또렷해진 의식만이 선명하다.
이 깊고 어두운, 심연 그 자체에서 잠도 없이 또렷한 의식만이.
그는, 참담했다. 순식간에 더없이 비참하고 괴로웠다. 온 생을 둘러봐도 이와 비견할 고통은 없었다. 혈기는 넘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수련만 하던 시절에도, 동생을 잃은 직후에도 이와 같진 않았다. 끝없는 회상과 추억, 새카만 또렷함은 심연을 가르고 자체가 되려는 듯했다. 사랑하는 이의 안락함을 절대적인 힘이 빼앗았다는 분노와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절망. 절망! 또 절망.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자신은 빠져나갈 수 없는 무형감옥에서 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물속에 있다. 가슴을 에는 통증은 현실감이 없어서 차라리 진짜나 되라고 뜯어버렸다. 뼈가 보이도록 살점을 찢고 제 목을 졸랐다. 악을 쓰다 혀를 다 씹어놓고 진작 너덜거리던 손톱을 뽑아버렸다. 고통? 그래, 순간 선뜩하게 숨이 멎는 아픔이 찾아오지만 그래도 절망이 난도질한 가슴이 훨씬 더 아팠다. 멎을 숨이 없는 자에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운강이 자해를 그만둔 것은 온몸이 성한 데라곤 없을 즈음이었다. 정확하게는 드러나는 신체의 자해를 그만두었는데 도통 의미가 없어서였다. 사지를 분시해도 자신은 죽을 수 없다. 몸통에서 거의 떨어지기 직전인 팔이 덜렁거리는 것이 몹시 귀찮은데다 이제는 아픔도 희미했다. 허무한 깨달음이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이곳은 정신을 갈갈이 찢는 곳이라는 자각. 안 것을 더욱 확실하게 알고나자 정신이 들었다. 누구 좋으라고 정신을 놓겠는가. 자칫 그들에게 자신을 빼앗길 수 있다. 이지를 잃고 문평마저 잊은채 손쉬운 꼭두각시가 되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운강은 다시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자비한 폭주가 아니라 정신이 조각나 미치지 않도록, 자신을 위한 괴롭힘이란 것이었다.
최초엔 기의 운용도 미비했다. 혁련상이 기의 운용이 어렵다니 헛웃음도 안났지만 신체, 껍데기의 혈도보다 훨씬 운용이 까다롭고 지지대인 몸이 엉망이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러나 운강은 그 좁은 틈에 갇혀 더 독하고 가학적이 되어 정신을 일깨웠다. 미치면 안 돼. 놓아버리면 안 돼. 운용이 자연스러워지자마자 스스로의 혈도를 부글부글 끓이고 찢고 지졌다. 원래도 날카롭던 사람의 칼날이 시퍼렇게 벼려져 움텄다.
아직 인간의 몸을 가졌다면 골백번도 더 죽었을 어느 날. 운강은 갑작스레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새카만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는 무의 공간을 보고 무의 소리를 들었다. 불가사의를 밟고 새로운 의식을 입었다. 그가, 석문평이 느껴졌다. 그의 향, 그의 기운, 의심할 데 없는 반려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운강은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 처음의 어려움을 내버렸다. 그저 정신을 쪼개고 멋대로 아무는 모든 것을 비웃으며 악랄해졌다. 본능적인 내기의 활용은 그의 눈동자를 황금색으로 빛나게 하고 머리카락을 몸길이의 세 배도 넘도록 만들었으며 단숨에 생명을 앗아갈 지경의 뇌염마공이 몸 안의 세포를 조각내길 반복하다 결국은 혼융되어 피부에서도 빛이 스며 나왔다.
내가 가느냐, 그가 오느냐. 운강의 미친 인고와 폭주는 잔잔하던 강을 범람케 했다. 거대한 산의 흙을 빼곡히 채우고 넘쳐나 적을 둔 것들의 터전을 짓치고 목숨을 위협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신선들이 힘을 합쳐 산 전체에 결계를 치지 않았다면 먼 곳의 인간들에게까지 피해가 갔을 법한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렇게 산의 가장 뾰족한 꼭대기만이 겨우 물에서 빼꼼할 무렵, 운강은 손에 무언갈 쥐었다. 여러 겹잎이 선명한 노란색의, 흔한 들풀. '하하…' 그것을 손에 쥐고서야 운강은 폭주를 멈추고 웃어버렸다. 꼭 저 같은 걸로. 으스러지지 않게 꽈악 쥐어봐도 온기는 없다. 체취도 없다. 그저, 그저……. 아무것에서도 문평을 느낄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문평이었다. 운강은 입술 끝으로 꽃잎을 몇 번 물었다가 물로 작은 구를 만들어 소중하게 담아두었다. 드디어. 너를, 내가. 네가, 나를. 전혀 필요치 않았던 잠이 올 것 같았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하늘에서는 원래의 주제에서 벗어난 회의가 몇 차례나 이어졌다. 죽어 혼일 뿐인 존재가 각성을 했다. 가진 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어려울 지경으로. 누구와 대적이 되느냐의 문제보다 혼의 의중이 중요 사안으로 떠오르면서 각종 찬성과 반대, 무엇보다 우려가 깊어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질서가 흔들리는 만큼 그들의 격화는 마땅한 것이었다. 허나 그만큼 의견은 하나로 합쳐질 기미가 없었고 서로 간의 싸움까지 일자 천신은 직접 그들을 중재하고 천음을 내렸다.
''너의 진심이 장하여 그것을 확인코자 하니 너는 너의 성심을 다하라''
들꽃은 시들었다. 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운강은 문평을 찾아내야 했다. 유폐되었던 강에 거처가 마련되고 원하는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증좌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느껴야만 했고 태어나지 않는다면 기다림 뿐이었다. 십 년이나 걸려서 보여준 두 번째 얼굴은 야속해 할 시간도 없었다. 찰나 같은 만남은 몹시 허탈하여 얼마간은 아무것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걸 시작으로 짧으면 삼 사 년, 길면 사 오십 년의 시간을 두고 문평은 운강의 시간 곳곳에 찾아왔다. 유난히 귀가 긴 토끼일 때도 있었고 한 발 차이로 손에 잡아보지도 못한 아침이슬일 때도 있었다. 그러기가 얼마나 지났더라. 운강은 어느 순간 시간 헤아리기를 그만두었다. 그저 조건에 맞게 발견한 횟수만을 기억에 두고 문평을 찾으면 최대한 오래, 곁에 있을 수 있는 만큼 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세찬 비를 막아주고 험악한 발길질을 막아주면 불쑥불쑥 사무침이 치솟았지만 그런 것은 금세 치워버렸다. 아직 자신은 잡초의, 온통 꽃으로 무성히 뒤덮인 화단의 주인이었다.
이번의 평은, 그러니까 말을 하는 똑똑한 사슴은 아흔 번째 환생체였다. 천신과 약속한 아흔 아홉 번으로 가는 마지막 큰 산이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
[운강님…]
평이 그를 보고 '강님'이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그의 이름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줄타기를 운강은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평은 소리없이 울었다. 소낙비처럼 후두둑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곧 나란 말인가. 운강님에 대해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찢어질듯 아프기도 하지만 화도 난다. 저 문평이란 사람은 정말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말인가? 운강님이 저렇게 힘들게 버티고 있는데? 자신이었다면, 자신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던 혼자 슬픈 이 시간을 최대한 줄였을 것이다!
혼란이 줄지 않는다. 아니, 아니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냥, 그냥…. 너무 슬프다. 왜 운강님은 옛일부터 지금까지 하나하나 다 범상한 곳이라곤 없는 걸까. 왜 이다지도 기구한 걸까?
'울지 마라, 아가'
[저는, 흑, 저는!]
'울지 말라니까. 눈 짓무른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아주던 운강은 짧은 숨을 내쉬고 기다란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다. 그리 울 일이 아니라는 데도 그러는구나.'
[지금까지 어떻게!! 아니, 아홉 번이나 남았잖아요…]
'아홉 번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그거면 되는 거다.'
생각처럼 매끄럽지 않게 나간 말들이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사실 운강의 마음은 요동친 만큼 더 크게 울렁이고 있었다. 강님에 이어 운강이라는 이름을 듣자 오랫동안 삭막했던 사막에 폭우가 내린다. 깊숙한 곳에 숨어 흔적만 남은 꽃이 망울을 틔웠는데 그것은 아주 잠깐의 신기루일 뿐이다. 길고 긴 기다림에 대한 보상, 목축임. 어쩌면, 마지막 관문으로 가는 시험.
운강은 급격이 피로해지는 눈가를 손으로 눌러 식히며 차분해지려 애썼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아홉 번. 환생이 되풀이 될수록 수명이 길어졌으니 어쩌면 장담할 수 없을 세월을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찌한단 말인가. 오래 두고 보아 좋다고? 그건 평이 인간이 아닌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갓 들풀이라 기꺼웠고 하찮달 수 있을 생명이라 안타까웠을지 모른다. 이렇게 말을 섞으며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문평의 생을 받고 나면, 혹여나 축생을 벗어나 인간의 모습으로 핍박받는 그를 보기라도 한다면. 그의 생에 자신은 끼어들 수 없다면….
잠시 숨과 마음을 고른 운강은 세월의 힘을 빌렸다. 옛 기억을, 그동안 버티게 해주었던 것들을 드넓게 펼쳐본다.
'알고 있느냐? 네가 불러주어 참 오랜만에 내 이름이 좋았다.'
[예. 나중에는 교주님이라 부르면 싫어하셨지 않습니까]
'자주 들으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왜 모릅니까? 일부러 장난치고 일부러 토라진 척 하셨던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문평아'
[저는 당신이 그리 부르시면 심장이 덜컥덜컥합니다. 왜요, 또 제가 필요하십니까? 아! 나무꾼이 당신이었던 것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그러시는 거지요?]
가끔 당신은 정말 깜짝 놀라게 어이없고 부끄럽습니다. 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자 눈을 질끈 감아버리게 된다. 너무 피곤한 겐가. 그래, 이름을 부르며 따르는 것도 모자라 눈물을 보이는 모습에 혼이 다 깎이는 심정이었지. 그래서 내가 이 아이에게 어떤 것들을 보여주었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었을 텐데. 그만한 잠을 재우진 않았을 것인데.
이제는 어떠한 뇌전도 줄 수 없는 찌릿함이 손끝을 저리게 한다. 가슴이 억지로 쥐어지고 늘어난다.
[정말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아직도 윤형의 모습을 빌리시다니요! 거기다 당신 머리카락 왜 이렇게 길어졌습… 니까…]
평이 손을, 그러니까 앞발을 뻗으려다 멈칫한다. 우리의 눈과 눈의 거리를 짐작하자 잠시간 모든 것이 정지한다. 멍한 정신으로 흐름을 잡을 수 없는 순간, 의심과 두려움이 확인을 망설이게 한다. 사방은 캄캄하고 눈에는 서로만이 오롯하다. 덜컥 숨을 집어먹고 부대낀 통증이 인다. 발밑의 땅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아직, 일, 터인데'
가시를 삼킨 운강의 목소리가 평을 향한다. 상상이 턱턱 막히던 순간은 현실에서도 쉬이 흐름을 내지 않는다. 운강보다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평은 심하게 눈동자를 떨다 뿔로 운강의 가슴팍을 찔렀다. 그에게 다가가려다 뿔이 먼저 닿아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안 것이다. 어찌나 놀랐는지 꽁꽁 얼어붙어 부들부들 떠는 게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단순한 기억이었다면 그렇게 말해도 된다. 평아, 너무 많은 것을 보면 혼란이 올 수도 있는 게야.'
운강은 깊은 숨 한 번과 머리통에 닿아 쓰다듬는 손으로 정신을 차리려 한다. 언제 이렇게 방어적인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그라든 심장과 곤죽이 된 머릿속을 생각하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자위한다.
그리고, 확신하여 상처받는다. 아마 저 말은 정답이겠지. 운강 자신에게 만약을 위한 만약은 없다. 뻗어가지 못한 상상은 현실을 좀먹는 망상일 뿐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미치광이 씨앗을 뿌리는 벌레. 그만해야만 하는 수렁 속 신기루.
[저는…!]
[저는……]
잔뜩 울음을 먹은 평을 쉬던 자리로 데려가며 운강은 몇 번이고 괜찮다 말해주었다. 어깨에 축축하게 스미는 눈물이 피부를 타고 쓴맛을 낸다. 괜찮다. 괜찮아. 계속해서 똑같이 이어지는 말을 평도 운강도 듣고 있다. 괜찮다. 괜찮아야만 한다. 날이 선 정신을 다독이는 주문은 너무나 단조롭지만 피곤한 만큼 기꺼웠다. 기꺼워야만 했다.
-
''왜 그랬느냐''
뜬금없이 찾아와 대뜸 왜냐니, 익히 느꼈지만 하늘에서 일한다고 대단하다 치켜세울 필요 요만큼도 없다니까.
운강은 그가 하고자만 한다면 다 들을 수 있는 속엣말을 가식없이 뱉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사슴이지 않습니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둘일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닌 둘''
'불확실함에 걸기에는 걸린 사안이 너무 크지요.'
혼란이 잠드는구나. 운강은 역시나, 하며 의구심을 날린다. 허나 한순간에 휩쓸린 여파가 여실하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은 원망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항의할 생각은 없다. 오래 길이 들어 그런 것이 아니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까의 평은 문평이 맞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운강과 살 적 문평의 기억. 문평의 영혼에 문평의 기억이라니 그게 문평이 아니고서 누구일 수 있겠냐마는 그는 평으로 태어난 사슴이었다. 왼쪽 뿔 끝이 검고 말할 줄 아는 사슴. 문평이되 문평이 아닌 사슴은 만약 운강이 그대로 문평이라 받아들이고 상황을 일깨우지 않았다면 문평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 둘. 좋다. 문평의 기억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게 어떤 의미가 있어서.
영물이라지만 보통 사슴의 수명은 인간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설사 백 년을 살든 천 년을 살든 겉모습은 사슴. 인간이었던 기억을 가지고 사슴으로 살아가는 게 반가울 리 없다. 내면의 충돌은 위험한 것이다. 동물의 영은 맑고 순수하지만 그만큼 본능적이다. 덧씌워진 기억에 두 가지 본능. 운강은 이것이 시험이었음에 무게를 더한다.
''저 아이는 괜히 영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슨 뜻입니까?'
''네 올곧음이 경우의 수로 둔 것을 끌어왔다는 뜻이다''
운강의 눈에 반짝 이채가 들었다. 경우의 수라. 실로 말할 줄 알고 상응하는 지능을 가진 영물이 인간의 땅에 우르르 무리 지어 태어나는 것은 과한 일이다. 등선을 부르는 천산이라지만 엄연한 번뇌의 땅. 잉여 생명을 두지 않는 천신께서 안배한 일이라기엔 무리가 따랐다.
''집념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겠군. 때문에 천신께서는 너의 능력을 더욱 높이 사셨다''
'천신의 계획이 어그러진 게 제 시험 탓이라는 거군요.'
''꼬아 듣지 마라!''
신성모독으로 잡아가기라도 하실 겁니까? 세월을 입어 견고해진 그는 말을 삼켰지만 염라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버럭 화를 내고 아무런 손을 쓰지 않는 것은 그 견고함을 기꺼이 여기기 때문이다. 가늘어진 눈과 씰룩대는 입꼬리만은 숨기지 않지만, 운강도 염라도 그것을 모른 척한다. 가장 무서운 시간이 이런 관계에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염라야말로 에두른 말씀은 그만두시지요.'
''커흠!''
천신의 계획을 한갓 인간이 방해했다. 백운강은 생전에 힘과 무공으로 고금 제일의 남자이긴 하였으나 홀로 불가사의한 경지를 이뤘을 뿐 아직은 인간인 신분이다. 이만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인간이었다면 등선을 했어도 열 번은 했을 것이고, 이 경지는 천신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상태에서 가졌어야 함이 옳다. 하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또다시 최초의 길을 걷는 이 남자는 하늘에서마저 조용히는 살 수 없을 운명이다. 생전에 그러했듯 인내마저 가지고 있으니 이제는 누구도 강제할 수 없음이 자명하지 않은가.
''너는 범주 바깥의 인간이다. 죽었으되 인간이요, 인간이되 혼이다. 엄격한 법률로 다스려지고 있는 세상의 모난 돌이자 모든 것이 합쳐져 결국은 인간이랄 수 없는 존재. 힘을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하고 천신의 심기마저 어지럽혔다. 건방지다 길길이 날뛰는 수많은 존재를 다독이고 굽어살피려는 천신께 지금과 같은 생각은 죄를 짓는 것과도 같다는 걸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는 실로 이룬 것이 많다. 힘뿐 아니라 한쪽에 쏠린 익애를 나눌 수만 있다면 당장 신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이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집착보다 사랑을 우선에 두어 최초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다는 건 위대한 사실이다. 당장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여 쟁취할 수 있음에도 약속을 우선시한다는 것 또한. 하여 위안 뿐 아니라 귀감이 된 너에게 상을 내리고자 하니 예를 갖추어 임하라!''
-
[운강님 저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저는 그분의 혼을 타고 태어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눈앞에서 잔잔한 물결이 인다. 이 조용함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얼른 죽고 싶으냐?'
[당연히 아니죠!]
'헌데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야…]
인간 세상의 동물로 특별한 이유 없이는 신을 영접할 수 없는지라 평은 운강과 염라의 대화에서 차단되었다. 때문에 그들이 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고 문평의 기억 또한 사라졌지만 운강이 꿈으로 보여준 진실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다 만물에게 천신의 뜻을 공표한다는 뜻으로 퍼진 마지막 음성만은 평도 똑똑히 들었다.
[''백운강. 너의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운강님의 바람이라고 하면 아흔아홉 번의 환생체를 찾아 천신님을 만나고 인간이었을 때처럼 문평과 둘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예전처럼 사랑하면서 말이다. 물론 아홉 번의 환생이 남아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신님과 운강님의 만남에서 많은 것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이루어진다고까지 하지 않았나. 그렇다는 건 예정과는 달라진다는 소린데 여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운강님의 바람이 당장! 그게 아니어도 곧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석문평이라는 인간의 혼을 가진 평으로서는 그 혼을 내어줘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면 죽는 건가? 그건 좀 무서운데. 운강님의 바람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역시 본 기억만으로 해치우기엔 주춤하게 되는 게 사실이라 평은 우물쭈물 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너의 생이 있지 않느냐.'
[저의 생이요?]
'그래. 날 때부터 가지고 왔던 너의 생. 그것은 평이 네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걸 이제 와 빼앗아갈 일이 무에 있누?'
[하지만 운강님은,]
'하등 쓸데없는 생각이다. 너는 내가 이 세월을 얼마만큼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니까 더 빨리 보고 싶으신 것 아닌가요…]
평의 목소리가 작게 말려들었다. 운강은 평이 처음 보고 놀랐던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머리통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는 천 번의 가을 동안 서로만을 새기기로 했다. 살아있는 동안 그 가을을 모두 맞지 못하였으니 아직 함께할 날이 많은 게 아니냐.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 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너는 깜짝 놀랄 만큼 문평과 같은 행동을 하곤 한다. 원천이란 그런 거겠지. 무슨 말이냐면 말이다. 내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는 뜻이다. 다른 것들이 내 사람을 넘보는 걸 어찌 보고 있겠느냐?'
[운강님?]
'내 사람을 지키려면 응당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평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강은 그런 평에게 더 환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다음에 말해주마, 다음에'
[치잇...]
'그리고 말이다. 평아, 고맙구나.'
[네? 뭐가요?]
'이리 태어나준 것 말이다.'
천신은 운명을 관장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진 건 아니다. 생과 사, 윤회의 법칙은 보다 강력하게 적용되나 문평 또한 애를 썼다는 이야기다. 운강의 끈질긴 바람이 문평을 계속해서 이 땅에 불러냈다면 그 부름에 답해 태어난 것은 문평이다. 존재를 막론하고 제 모습을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던 것이 문평인 것이다. 만약 문평이 답해주지 않았다면 운강은 그를 찾아내지도, 계속해서 기다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운강은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윤회는 혼의 법칙이자 기꺼운 두려움. 그 안엔 시련이 있다. 나아가기 위해선 발판으로 삼아 성장해야 한다. 거듭된 환생에서 더 오래 운강 곁에 머물렀다는 건 문평이 얼만큼의 노력을 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허니 다음 생의 네게, 윤회의 끝을 기꺼이 고해주어야지. 이번엔 더욱 거리낄 것 없이 많이 사랑한다 해주고 많이 그리웠다 해주어야지. 온전한 너를 기다리며 해줄 말을 고르는, 사죄를 준비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어찌 싫다 하랴.
'오랜만에 뭍에 가볼 테냐?'
[운강님이랑 같이 갈래요]
'그럼 그러자꾸나.'
문평아, 나는 너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