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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秋世印​
千秋夜話​

 

*활자지옥 주의

*테마: 호두까기인형(?)으로 시작했으나 망했음 주의(!)

 

서쪽 하늘에는 반달(半月)이 빛나고

글: rosaline(@rosaline1905)

 

 아이가 눈을 뜨니 희미한 호롱불이 아른거렸다. 한밤중에 감히 귀하신 분의 침상에 겁 없이 누워있었으니 아이의 윗전이 이 광경을 보시면 한숨을 푹 쉬실 것이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옆에 앉아있던 그림자가 살며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다정하게 아이의 몸을 눕히고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다. 쓰다듬는 손은 서툴렀지만 따뜻했고 매번 아이의 마음을 간질였다.

 “아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이냐.”

 “보내주시어요. 아씨께서 아시면 또 경을 치실 겁니다.”

 “그럼 우리 또 같이 혼나자꾸나.”

 “그러다 태상교주님께서 노하시면요?”

 “…….”

 잠시 고민하다 아이의 윗전이 살며시 미소를 짓자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아마도 그분께선 이젠 어리광을 그만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냐며 심통 아닌 심통을 부리실 것이고, 지금 아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분께선 다행히 어느 누구 덕분에 한참 일해야 할 이른 나이부터 놀고먹는 생활을 보내게 생겼으니 이 정도의 소소한 것들은 가볍게 넘길 때도 되지 않았냐며 받아치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겨운 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 이 어둠을 달래고자 그리하였다며 입술을 샐쭉거리시면 그 이후 시비들은 한 이틀은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마교 교주조차 함부로 출입이 어렵고 천하를 통틀어 제일 은밀하다는 비익전(比翼殿)의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다.

 아이가 비익전에 발을 디딘 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이의 첫 기억은 지금 눈앞의 윗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굳은살투성인 그의 손은 거칠었으나, 아이가 마주한 그의 눈은 오후의 햇살처럼 따사로웠으며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귀인은 금강석(金剛石)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 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아이는 마교의 금역, 비익전에서 키워졌으며 제일 귀히 섬겨야 하며 평생을 모셔야 할 분을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평생을 모셔야 할 분들께선 교육보다는 이렇게 몰래몰래 아이를 불러내어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오늘도 시비의 숙소에서 몰래 빼돌려진 아이는 감히 비익전 제일 깊숙한 침상, 제일 귀한 품에 있었다. 태상교주가 계시지 않는 날이면 아이는 그 품에서 잠이 들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본인도 알지 못하는 옛 고향의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평소라면 눈 꼭 감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을 시간인데 눈꺼풀만 뻐끔뻐끔하며 날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마후가 열 살 남짓 된 소녀를 토닥토닥 두드리자, 소녀가 다시 눈을 뻐끔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그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더없는 온기가 눈물처럼 흘렸다.

 “우리 아이가 무엇이 고파 잠을 못 이룰까. 배가 고픈 것이냐?”

 소녀가 살살 도리질을 하는 것에 그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척하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오호라,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고픈 것이로구나.”

 “소녀, 나중에 이왕 혼날 거면 제대로 혼나고 싶습니다. 마후님, 옛이야기 좀 들려주시어요.”

 “내가 그런 재주가 있을 성싶더냐. 정 그렇다면 태상교주님과의 인연을 얘기해줄까?”

 “에이, 그건 예전에도 해주셨지 않습니까. 새로운 이야기요. 마후니임.”

 “미안하구나, 내가 아는 기담이 그리 많지 않구나.”

 “그럼 그 얘기를 해주시어요. 태상교주님께서 마후님은 제2차 마정대전을 막아내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러셨단 말이지…….”

 소녀의 해맑은 부탁에 마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세간에서 쉬쉬하는 제2차 마정대전. 과연 그것을 막았다고 볼 수 있을지. 아직도 어제 일인 양 생생하여 저도 모르게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기억을 스스로 얘기할 자신 따위 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별 볼 일 없던 어린 시절,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아이에게 찾아온 기이한 인연에 관하여 말이다.

 “그럼 이건 어떠려나. 옛날옛날에 한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단다.”

 어린 소녀가 마후의 품을 다시 파고들었다. 토닥토닥.

 

# 일몽(一夢)

 옛날 옛날에, 아주 오랜 옛날에 한 사내아이가 있었단다. 그 아이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피가 흐르는지 알지 못한 채 태어났지. 그저 기억나는 것은 싸늘한 밤바람과 까끌까끌했던 흙바닥, 그리고 막사 구석에 버려진 포대 안의 아이. 중원 변방의 어느 아이가 눈을 뜬 순간, 눈앞의 모든 이들이 그 아이의 윗전이 되어있었단다. 낮이 되면 한없이 걸어야 했고, 밤이 되면 천막을 치는 것을 돕고, 장작을 챙겨와 불을 때고 지친 말을 돌보아야 했지. 그렇게 공기처럼 녹아드는 법을 배우며 살았단다. 그래, 그런 아이가 있었단다.

 그때가 네 나이쯤 되었을 때였던가. 그 아이는 어느 다른 날과 다르지 않듯이, 변방 사막 부근에서 사람들이 천막을 치는 것을 돕고, 불을 때기 위해 장작을 모으려던 참이었어. 그날은 한 군인이 아이를 동정하며 목마와 목검을 들고 있는 군인이 새겨진 작은 나무 조각을 준 날이기도 했지. 아가, 너는 태상교주께서 처음으로 네게 작은 인형을 받았을 때를 기억하니? 초롱초롱한 별들이 네 눈에서 피어나던 때 말이야. 그 아이도 그랬어. 기껏해야 끼니를 때울 것만 받았던 아이는 얼떨떨하면서도 처음으로 외롭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단다. 짚단 이불을 같이 덮을 친구들이 생겼잖니. 그래서 그들을 다 해진 천조각으로 어수선하게 기워진 보자기 안쪽에 잘 감싸두었단다.

 서쪽 밤하늘에 반월이 떴을 즈음, 나뭇가지를 줍던 중에 옥빛을 닮은 기이한 불빛이 소년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단다. 작은 숲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막인데, 반딧불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 불빛이 나비처럼 일렁이며 아이의 부근을 맴돌았고, 이윽고 그 불빛은 원을 그리며 사막 우물 옆 커다란 바위로 아이를 이끄는 것이 아니겠니. 그 바위에는 흰색 패옥이 놓여있었어. 근처 마을주민이 물을 긷다 떨어뜨렸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꽤 귀해 보였지. 패옥을 품에 안고 막사로 돌아가는데, 막사는 수라장으로 변해있었지.

 “비적단의 기습이다! 쳐라!”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아직 어려서 검을 잡아본 적도 없었어. 이럴 때는 구석에 숨어서 조용히 기다리거나 막사를 따라다니며 밥을 짓던 아낙네들 틈 속으로 도망갔지. 그런데 그 아이는 하필이면 막사 안쪽에 두고 온 제 보자기가 먼저 떠올랐지 뭐야. 첫 친구를 찾아오겠다며 그 난리 통에 뛰어들고 말았어. 어째, 어째 운 좋게 보자기를 찾은 것까진 좋았는데, 숨으려고 보니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그 광경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오지 뭐야.

 “쟤, 꽤 값나가는 걸 가지고 있나 본데?”

 “에이, 이 작은 부대에 겨우 저런 꼬맹이가 가져봤자지.”

 시시껄렁한 대화였지. 고작 검조차 쥐지 못하는 사내아이 하나 어떻게 해보겠다며 다가오는 도적들 사이로 싸늘한 달빛이 흐르더니 사내아이의 품에 있던 패옥과 보자기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제 눈을 가렸지.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사라질 때쯤, 털썩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단다.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죽어라.”

 후드득. 연이어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도 났지. 사내아이가 눈을 뜰까 말까 시간을 가늠하는 사이 아이의 손을 가만히 쓸어 내려주는 다른 손이 있었단다. 그 손은 조금 거칠게 사내아이를 안아 올렸고, 아이는 위기감에 그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

 “괜찮다, 괜찮아. 이제 괜찮다. 우리는 널 찾으러 왔단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이제 눈을 떠보렴.”

 음색이 곱고 다정하여 소년은 그 품에서 눈을 떴단다. 막사를 떠돌면서 많은 무인을 보아왔지만, 그때만큼은 자신이 드디어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생각했단다. 기골이 장대하고 무엇보다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거든. 까만 큰 그림자 끝에는 달빛만큼 서늘한 칼날이 번뜩이고, 아까의 은은한 반딧불이 그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더 묘했단다. 어두컴컴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용모 또한 남다른 사람임이 분명했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같았어.

 “저……, 두 분께선 혹시 선인이십니까?”

 “음, 나는 모르겠다만 저분은 그리되실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는가. 자네를 두고 덜컥 등선하느니, 차라리 함께 삼도천(三途川)을 건너자고 말이야. 잊지 않고 챙겨갈 테니 그런 걱정은 집어치우게.”

 “……농이시겠지요?”

 “내가 자네를 두고 농을 한 적이 있던가?”

 “하하…, 물론… 없으시지요.”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단다. 그 무인은 작게 ‘예전에도 순장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으휴’라며 중얼거리기도 했지만, 아이가 그 말을 이해할 리가 없지. 그리고 그 일행으로 보이는 귀인은 잠깐 물끄러미 사내아이를 쳐다보더니 희미하게 웃고는 막사 바깥을 나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셨단다. 피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아이는 몽롱해져 그런 걸 맡을 겨를도 없었지.

 “대강 정리는 해뒀다. 필요 없는 것들은 치우고, 여기 놈들은 모두 재웠으니 이젠 좀 조용히 달구경이나 하러 가자꾸나.”

 “저, 누구시온지…….”

 “네 벗이란다. 그 보자기 안을 살펴보련?”

 무인의 말에 사내아이는 보자기 안을 들추어보았어. 그런데 분명 그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목마와 군인 조각이 사라졌지 뭐야? 아이는 사라진 보자기 안과 눈앞의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어. 그리고 막사를 제일 먼저 나선 무인이 아이를 향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

 “그게 우리다. 아가.”

 아마 아이는 그때부터 긴가민가하던 추측을 확실히 했단다. 꿈이라고. 오늘 행군이 힘겨운 탓에 장작을 줍는 사이 곯아떨어진 거로구나. 그렇게 말이다. 소년이 멀뚱히 그들을 번갈아 바라만 보고만 있으니 무인이 품에 안은 아이를 내려놓았단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 쉬이 믿지 않을 거라 했지요?”

 “확실히 자네 말대로 어릴 적이 더 제법이군.”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그저 단순한 감상일세.”

 꿈이 이렇게 생생해도 되는 것일까. 볼을 꼬집어보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서늘한 검을 치우고 성큼성큼 다가온 무인은 무릎을 굽혀 앉더니 소년의 눈을 맞추며 물었단다. 어둠 사이에 하얀 달빛을 받은 얼굴은 그 아이가 알고 있는 말로 설명이 되지 않았지. 잠깐만 스치는 시선에도 넋을 잃을 얼굴이었으니, 그 눈을 마주한 아이의 혼은 어찌 되었겠느냐 말이야.

 “네가 우리를 부르지 않았더냐, 아가. 저 패옥을 품고 무슨 생각을 했느냐. 그게 우릴 불렀다. 네 간절한 소망이 여기에 닿아 우리가 왔으니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거라. 그럼 들어주겠다.”

 “아직 제 소원도 꿈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런 걸 붙잡아 물어보아도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둘이 대화하는 사이 아이의 머릿속은 이런 것들로 다시금 가득 찼어. 꿈이로구나. 목마와 나무인형도. 아까의 반딧불이도. 하얀 패옥도. 비적도. 모두 다 허상이고 환상이로구나. 두근거림보다는 힘이 조금 빠졌던 것도 같았단다.

 “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보같지 않느냐. 꿈이라고 생각했다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꿈꾸면 그만인 것을 그것조차 제대로 생각해내지 못하는 아이니 말이야. 소년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소년을 나무라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더니 들어 안아 올리지 뭐니.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자꾸나. 이제 달구경이나 하러 가볼까.”

 

# 금목서(金木犀)

 막사 바깥은 죽은 듯이 조용했어. 본인을 백가와 석가라고 소개한 무인은 아무렇지 않게 부대를 빠져나왔지. 그리고 아이를 안고 허공을 뛰고 하늘을 날기 시작했단다. 아이의 눈앞에 밤의 천막이 펼쳐졌고, 그중 가장 싸늘한 기운을 내뿜던 반달이 아이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어.

 “저, 백공자님. 달구경을 달로 가서 하나요?”

 “내 경공이 남들보다 조금 비상하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긴 오늘 밤 내로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그러니 그저 가만히 네 소원이나 생각하거라.”

 꿈인데 잠자코 소원이나 생각하라고 하는 은인이라니, 어째 순서가 안 맞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이는 처음으로 제대로 밤바람이 제법 시원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 상관하지 않았어. 늘 차고 시리다고만 생각했던 바람이 누군가의 품속에 있으니 오히려 자신의 온몸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느낌이었지. 백공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석공자에게 아이를 넘겨주었어. 뒤를 따라오던 석공자는 아이를 넘겨받으며 어째 백공자를 바라보는 표정이 무척 심란해 보였단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 둘에게도 조금 사정이 있었는데 으흠, 이건 다음에 때가 되면 얘기해주마. 오늘은 그 사내아이의 꿈 이야기로 집중하자꾸나.

 “늘 거기에서. 나는 먼저 준비해놓을 테니, 천천히 따라오거라.”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백공자는 사라지고 없었어. 석공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를 안고 사뿐,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단다. 아이는 어차피 꿈이고 환상인데 될 대로 되라 심정이었는지 그들의 대화에 별 관심이 없었지. 게다가 석공자 품에서는 밤하늘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미 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버렸거든. 보석을 곱게 갈아서 뿌려진 듯한 하늘은 마치 방금 전까지 자신을 안고 있었던 백공자의 피부처럼 부드러워 보였지. 매번 잔심부름을 하고 마지막에는 막사 구석에서 짚을 덮고 지쳐 잠드느라 밤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운지를 그 아이는 처음 알았거든. 고개를 빼꼼 내밀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석공자가 스치듯이 저것이 칠성이라고 속닥거려주기도 했어.

 한창 위로 고개를 든 탓인지 아이는 목이 뻐근해져서 무심결에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았어. 그곳엔 검은 사막이 숨죽이고 있었지. 어두컴컴한 우물 안, 꼭 그런 곳 같았단다. 어흥, 하고 아이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어둠에 아이의 두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단다. 그것을 짐작했는지 석공자는 아이를 다시 감싼 뒤 더 멀리, 멀리 그 사막을 벗어났단다. 무성한 숲을 지나고, 작은 마을을 여럿 지나고, 어느새 높은 바위산 골짜기에 도착했어. 그곳엔 백공자도 있었는데 그에게선 금목서향이 풍겨 나왔어.

 “이게 다 뭡니까?”

 “달구경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앉자, 아가. 자네도 어서 앉게.”

 하늘의 손길이라도 닿았는지 정교하게 깎은 듯한 바위 골짜기에는 상쾌한 소리가 들리는 계곡이 산자락을 휘감고 있었단다. 주변에는 금목서가 곳곳에 심겨 있었는데 야심한 밤에도 영롱한 불빛들이 날아다녔고, 유등이 걸려있는 곳에는 아이가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상차림이 놓여있었다고 해. 옆의 보들보들한 비단 자리 위에는 화드득 불씨를 뻐끔거리는 금동화로가 있었고 그 위에는 무쇠 주전자가 콜록콜록 기침 중이었어. 만찬상에는 수십여 가지 음식들이 휘황찬란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담은 그릇도 고급유약을 바르고 금칠, 은칠이 되어있는 자기들 뿐이었어. 아이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자 정교하게 세공된 청화백자 찻잔이 아이의 앞에 놓였단다.

 “하나씩 맛보면서 달이나 구경해볼까.”

 젓가락을 손에 꼭 쥐어 무엇을 먹을지 몰라 당황할 때, 석공자는 하나씩 하나씩 아이의 접시에 덜어주었단다. 모두 아이의 입맛에 맞는 거였지. 과일과 다식도 오색찬란한데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라서 문득 조바심 또한 밀려왔단다.

 “콜록!”

 “저런, 천천히 먹거라. 도망이라도 갈까 싶은 것이냐.”

 “그렇지만! 해가 뜨면 모두 사라질 게 아닙니까.”

 그만 시무룩해져 아이의 입이 샐쭉 튀어나왔어. 꿈이 깨고 나면, 그 자리에 허망함만 남으니까. 좋은 꿈일수록 거대한 썰물이 지나간 것처럼 현실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지. 허무함과 쓸쓸함만이 까끌까끌하게 남아 혀에 맴도는 입맛도 쓴 기분. 아이는 그런 기분을 잘 알고 있었어. 입에 들어가는 것은 많은데 자꾸 허기가 지기 시작했지.

 “네가 원하는 대로 믿거라. 꿈이라 믿으면 꿈일 것이고, 현실이라 여기면 현실이 되어 네 배가 부를 것이니. 혹여 그것이 널 아프게 해도 금방 잊힐 것이야. 그러니 천천히 먹어도 괜찮다. 달이 저리 훤하게 떠 있는데 금방 달아날 것 같으냐?”

 이상했어. 백공자의 말은 뭐든 다 이뤄질 것만 같았거든. 그제야 아이는 입안에 있는 것들이 제법 벅차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을 수 있었지. 붉은색의 과일도, 윤기가 흐르는 당과도 아이의 입맛을 계속 돋우었어. 아이가 먹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두 공자는 안심했다는 듯 그제야 천천히 찻잔에 차를 부으며, 몸을 느긋하게 펼치기 시작했단다. 사실 여기는 두 공자가 종종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고, 두 공자끼리만 알고 있는 은밀한 달구경 자리였거든.

 “무이산(武夷山) 암벽 틈에서 자란 차나무로 만든 차이다. 협곡의 높은 절벽에서 사람의 손길 없이 당차게 저 스스로 자라온 것들이지. 이런 것들이 내 취향인가 싶다. 예전엔 은은한 단맛이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런 진하고 억센 게 점점 좋아지더구나. 입안에 넣고 굴리면 단맛이 제법이거든. 어떠냐, 제법 당차지 않으냐.”

 어느새 석공자에게 기대있는 백공자가 찻잔을 높이 들었어. 구경꾼이라고는 기껏 사내아이 하나였지만, 이젠 구경꾼이고 뭐고 거리낄 것이 없어졌는지 남사스럽게도 둘이 이리저리 몸을 맞대어 누워있기도 했지. 물론 가끔 한쪽에서 손바닥을 찰싹 때리기도 했어. (아이가 봅니다! 그렇게 내빼어봤자 이미 그 아인 볼 거 다 봤다라고 능글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더랬지) 백공자의 말에 아이도 찻잔을 유등에 비춰보니 투명한 호박색의 찻물이 일렁거리는 걸 볼 수 있었어. 조심스럽게 한 모금 홀짝거려보니 진득한 단맛이 혀를 감싸고 돌아 아이도 꽤 마음에 들었단다. 아이는 점차 포만감에 노곤노곤 힘이 풀렸고, 두 공자는 그런 아이를 쓰다듬거나 같이 자리에 털썩 누워 밤하늘을 지긋이 바라보기도 했지. 그리고 달이 기울기 시작했을 때쯤, 자리에 놓인 금을 켜보기도 했단다. 긴 손가락 사이로 펼쳐지는 음률은 여유로웠고, 우아했으며 계곡물처럼 맑았더랬지. 아이의 귓속부터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음률에 아이의 마음도 점차 화롯불의 불씨처럼 차츰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했단다. 배부르고 등이 따끈따끈한데, 은은한 선율까지 흘러오니 점점 아이의 눈꺼풀도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그래, 이제 소원은 생각했느냐?”

 “…아, 직… 잘… 모르겠…습니다…….”

 달은 점차 저물어가고, 아직 화로의 불씨는 따뜻한데 그 순간 아이는 다시 깨달았지. 자기가 누군가의 품 안에 안겨있는 걸 말이야. 그렇지만 이미 아이의 의식은 점차 수마가 꿀꺽꿀꺽 삼키는 중이었어. 바로 지금 너처럼 말이지, 우리 아가.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모양이구나. 나중에, 아주 나중에 또 물어볼 테니 그때는 답해줘야 한다. 알겠느냐?”

 “……. 네……, 공자님…….”

 “단꿈 꾸거라. 그 누구도 꿈에서라도 널 해칠 수는 없단다, 문평아.”

 

# 후일담

 살기 위해 혹은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만 생각했던 사내아이는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꾸고 정신을 차려보니 군영의 마차 안에 있었다. 병사의 말로는 전날 밤 그 부대는 비적의 습격을 받았는데, 어째서인지 눈을 떠보니 비적의 시체만 쌓여있었고, 그 전날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더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는 제 옷과 품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전날에 보았던 흰색 패옥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꿈을 꾼 것일까. 그러나 아이의 시선은 끌어당긴 건 낡은 천조각 보자기에 싸여있는 목마와 목검을 든 군인 나무조각이었다. 목검을 바라보던 아이는 병사에게 자신에게도 검 쓰는 법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 그들의 후일담

 달이 질 때쯤, 아이의 새근새근 숨소리와 함께 마후의 손으로 따뜻하고 큰 손이 느껴졌다. 마후가 눈을 떠보니 아이를 가운데에 두고 마후의 손을 꼭 잡은 정인이 누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 이런 짓을 했군.”

 “그야 오지 않으시니까요.”

 “이 아이를 특별히 여기는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이 아이를 애꿎은 불구덩이에 던질 생각이 아니라면 적당히 하도록 하게.”

 “네? 제가 이 아이의 부모나 다름없는데 어찌 그런 짓을 합니까.”

 “이리 자주 부르고 아끼면, 천마후가 제자를 키운다는 소리가 왜 안 나오겠는가. 내 옆에서 이 정도 살았으면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알아야지.”

 마후는 자신의 손을 은근히 쓰다듬던 손을 탁, 치고 침상에 일어났다. 사흘만의 재회인데 볼을 서로 비비지는 못할망정 아직도 생각이 부족하다는 훈계나 듣고 있어야 한다니. 그런데 듣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천마의 걱정이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더 열이 올랐다. 마후가 침의를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머리 꽂이를 빼내려 하자 천마의 손이 먼저 빠르게 마후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마후 대신 마후의 머리 꽂이를 빼내고, 참빗으로 마후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마후의 열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서?”

 “형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들려주었습니다. 형아를 만난 이야기는 빼고요.”

 침상에 누워있는 작은 소녀, 형아는 천마와 마후가 중원 유람을 다니고 천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아이였다. 검은 사막 한가운데, 폐허가 된 마을 터에 도착할 때쯤 마후가 가지고 있던 천마의 형아패가 환하게 빛났고, 형아패가 내뿜는 빛을 따라가니 그 속에는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시절 어린 자신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간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마후가 놀란 것은 형아패가 시간의 흐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같이 있던 천마가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마후임을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어릴 때 자신을 꼭 껴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챙겨주는 모습에 마후는 괜히 그의 손을 찰싹 때린 것이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자신에게 남색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벌써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달구경이 계속될수록 덩달아 마후의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어린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형아패가 빛을 내뿜던 자리에 작은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지금 비익전 침상을 차지하고 있는 형아였다.

 “란소저의 뒤를 이을 아이로 두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합니다.”

 “그럼 그때 그 아이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게. 란란을 배워서 나쁠 건 없지. 자네는 그저 잘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되네. 자네도 알아서 잘 자라지 않았는가.”

 “이게 잘 자란 겁니까?”

 “날 만났으니 그렇지.”

 그렇게 따지면 당신의 취향으로 자란 것이 불행이고 다행이네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후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뒤끝을 익히 잘 아는 마후에겐 침묵이 나은 선택이었고, 더 나은 선택은 말꼬리를 돌리는 일이었다.

 “그 때 그 일 말입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자네가 워낙 소원을 빌지 않으니 형아패가 알아서 그 소원을 짐작해주었나 보지.”

 거친 머릿결에 참빗이 매번 걸려 마후는 뒤돌아 천마에게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전엔 뿌리가 뽑히는 듯한 아픔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니 머릿결도 알아서 참빗의 위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전부터 궁금했던 것입니다만. 그때 어떻게 바로 화려한 음식상과 금동화로가 거기에 있었던 걸까요? 당신께선 그때 과거로 돌아갈지 모르셨을 테고. 어디서 훔쳐 오기라도 하셨습니까?”

 “난 또 뭐라고. 그야 교에 명을 내렸지.”

 “네? 그때는 당신께서 교주로 계실 때 아닙니까? 그럼 과거의 천마께 청을 넣으신 겁니까?”

 “내가 천마인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나? 내가 마교의 비밀분타에 명을 내려 적당한 것들로 챙겨왔지.”

 “그럼 마교가 발칵 뒤집어졌을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시간의 흐름이 꼬였는데, 아니 깨달음을 얻어 반로환동하셨다는 분께서 시간의 이치 하나 고려하시지 않았단 말입니까?”

 “전대미문의 천마사칭 사건이 일어났으니 교의 비선도 새로이 점검하고, 보안도 정비하고. 이참에 거슬리던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으니 교에도 과거의 내게도 득을 보면 득을 보았지, 손해 본 건 없었다. 뭐, 넌지시 서찰 하나 정도는 남겨두긴 했다만. 덕분에 어린 자네를 만났을 때도 별로 놀라진 않았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만 이게 그거였나 싶더군.”

 마후의 머릿결이 정돈되고 천마는 참빗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마후의 침의를 한꺼풀 벗기기 시작하고 왼손으로는 마후의 다리를 은밀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후는 잠시 아무 말 없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천마를 비익전 바깥으로 밀어내더니 문을 꼭꼭 걸어 잠갔다. 역시 이것도 흔한 비익전의 하루였다.

 

 

 - 그래서, 마후님? 마후님의 소망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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