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秋世印
千秋夜話
돌멩이 각시님
W. 나린(@narynahha)
신강 땅 작은 어느 마을에 석문평이라고 하는 부지런한 것이 장점인 평범한 농부가 살고 있었어요.
이 석문평이라고하는 농부는 자기와 맞는 짝을 만나지 못해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간 총각이었어요. 자기와 혼인해줄 상대를 찾고 싶어도 문평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혼인을 하지 않은 처자가 하나도 없었거든요.
분명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노총각으로 혼자 늙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신 산신님께서 꼭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논에서 열심히 김을 매던 문평이 이렇게 햇살도 좋고 바람도 이렇게 좋은 날인데, 곁에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쓸쓸하여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가을에 이 곡식을 거두면 누구랑 같이 먹고 살지? 나한텐 각시도 없는데.”
남들은 벌써 혼인도 다 하고 아이도 낳고 해서 토끼 같은 자식들 재롱 보는 맛에 산다는데. 자기한테는 그런 복이 왜 없는 건지. 산신님께서는 자신을 굽어 살피고 계시기는 한 건지. 문평이 우울한 낯빛을 하고 다시 몸을 움직이려는데, 어디선가 낮지만 듣기가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나하고 먹고 살면 되지.”
“...?”
‘어? 이상하다! 누가 대답을 하는 거지?’
문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더 말했어요.
“이 곡식을 거두면 나는 누구랑 같이 먹고 살지?”
“... 누구긴 누구야 나랑 같이 먹고 살지.”
귓가로 정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평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여기에 사람이라고는 자신 하나뿐인데. 바로 옆에서 서서 직접 말하는 것처럼 가깝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박하고 순진한 시골 농부였던 문평은 귀신이 대낮부터 자신을 홀리려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요.
“거...거기 누구십니까? 귀신이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면 정체를 밝히십시오!”
“같이 먹고 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귀신이면 물러가라고? 생각보다 매정하군.”
웃음기 가득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어디선가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툭 날아와 문평 앞에 떨어졌어요.
설마... 이 돌멩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래도 진짜면 어떻게 하지. 무서우니까 멀리 던져버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문평이 조심스레 손을 펴 돌멩이를 집어 던지려고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평의 손안으로 돌멩이가 저절로 알아서 날아들어 왔어요.
“으악!!!!”
“일단 가져가 봐. 가져가면 아마 좋은 일이 생길 걸?”
손에 돌을 쥔 문평이 조금 더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어요.
역시 아까 그 목소리는 이 돌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어요.
쓰다 버린 물건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변신해 도깨비가 되는 것처럼, 문평은 이 돌멩이도 산신님의 영험한 기운과 축복을 받고 자기에게 말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거기다 자기를 가져가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니. 문평이 날마다 간절히 비는 소원을 산신님이 들어주시기로 한 게 틀림없었어요.
‘아이고, 산신님.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돌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 분명 좋은 인연이 제게 오리라.
문평이 조심스럽게 돌멩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마당의 물 항아리 속에 넣어두었어요.
언제고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도록 말이죠.
-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마당에 있는 평상 위에 맛있는 아침상이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찰기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맛난 쌀밥에, 금방 끓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리 탕. 거기다 이 신강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생선찜까지. 그동안 문평이 소박하게 먹어왔던 밥상과는 차원이 다른 진수성찬에 문평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어요.
‘누가 이 밥상을 차려 놓았을까?’
혹시나 하고 부엌을 샅샅이 뒤졌지만 누군가가 요리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설마.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까? 싶었던 문평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도록 아침에 눈을 뜨고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마루 앞 평상에 호화로운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밥상을 차려준 누군가의 성의를 생각해서 첫날부터 한 번도 빠짐없이 아침을 먹어왔던 문평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나고 자란 고향도 아니라 마을 사람들 중에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사람도 없고,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주일이나 이러한 밥상을 누군가가 차려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거든요. 그리고 부엌살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문평이 봐도 상 위에 차려진 그릇이나 젓가락 등이 매우 고급스러웠다는 점도 의심스러웠어요.
대체 왜, 누가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문평은 한 가지 꾀를 내었어요.
다음 날, 새벽닭이 첫 울음을 울기도 전에 자리에서 소리 없이 일어난 문평은 방문에 구멍을 뚫고 그것을 통해 밖을 엿보았어요.
그렇게 일각 (一刻, 1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휙, 하고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마당에 있는 물 항아리에서 9척은 가벼이 넘을 것 같은 큰 키를 가진 사내가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어요. 어, 저기는! 문평의 눈이 크게 떠졌어요. 마당에 있는 물 항아리에는 분명, 문평이 산신님께 받은 소중한 돌멩이가 들어있었거든요. 물 항아리에 있는 소중한 돌멩이. 그리고 거기서 나타난 정체모를 누군가. 문평의 머리속이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돌멩이를 가지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었는데 저 사람이 바로 그 ‘좋은 일’ 인걸까? 뚫린 구멍 사이로 문평 사내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물 항아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검은 장포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긴 머리를 가진, 그리고 선녀의 뺨을 한 열 번은 후려 칠 것만 같은 엄청난 미모를 가진 미남자였어요.
우와. 저렇게 잘생기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을 평생 동안 한 번도 본적도 없는데.
나 역시 같은 남자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말 잘생겼구나.
사내의 뛰어난 외모에 문평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어요. 사실 문평은 좋은 일이라고 해서 내심 참하고 아리따운 여인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들고 있던 커다란 보자기를 평상에 내려놓고 펼쳐서 능숙하게 아침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니 지난 이 주일간 문평에게 맛있는 아침을 차려주었던 이가 분명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이임에는 틀림이 없었죠.
아니 내 돌멩이가 저런 절세 미남자였다니!!! 세상에나! 산신님께서 내가 여인인줄 아셨나?
소원을 빌 때, 석문평 남자입니다. 하고 말했어야 했던 걸까?
잠시 그렇게 생각에 잠긴 문평이었지만. 평상에 화려한 아침상을 차린 사내가 다시 사라지려하자 마음이 급해져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어요. 그러자 마치 문평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녀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내가 빙긋 웃었어요.
사실 사내는 방 안에서 문평이 꼼지락대며 자기를 요리조리 훔쳐보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창호지에 뚫린 구멍이 알아차릴 만큼 좀 크기도 했지만, 사내에게 누군가의 기척을 읽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쉬웠기 때문이었어요. 기세 좋게 문을 박차고 나오고도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문평을 지켜보던 사내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해 그를 평상 가까이로 오게 했어요.
“당신이 주은 돌. 그게 바로 나야.”
“네????”
“농사짓고 같이 살자고 했잖아. 그래서 같이 살려고 왔지.”
“제가..요?”
“사내가 한 입 가지고 두 말 할 텐가? 같이 살자고 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 아니 저기... 당신 말이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사내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 문평이었지만 사내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물 항아리에서 나타났으니 저 사내의 말대로 그가 문평이 주운 돌멩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누가 나하고 살아주지, 하고 운을 뗀 문평의 말에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한 것도 맞고.
이치에 맞는 것 같으면서도 말도 안 되는 억지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문평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달리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어요.
“나하고 같이 살아줄 거지? 그렇게 약속했잖아.”
어느새 다가와서 문평의 손을 꽉 잡은 사내의 손이 어쩐지 따뜻했어요.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걸 보면 성격은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리도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면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진하고 순박하면서 단순하기까지 한 문평이 크게 숨을 내쉬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집에서 같이 삽시다.”
“좋다. 이제부터 내가 너의 각시가 되마.”
그렇게 자칭 돌멩이 각시라고 주장하는 사내와 얼떨결에 9척 장신 미남의 신랑이 되어버린 문평의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어요.
-
문평의 각시가 된 사내는 얼굴만 예뻤지 농사일에는 그다지 재주가 없고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대며 노는 것이 전부였어요. 할 줄 하는 것이라고는 밥 짓고 상을 차리는 정도? 그래도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아궁이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준다는 사실이 문평은 무척이나 기뻤어요.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었지만, 사내가 돌멩이여도, 아니어도 상관없었어요.
처음에야 당황해서 돌멩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걸 믿었다지만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산신님의 힘이어도 말이죠.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면서 문평은 자신이 속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어요.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즐거움을 알아버려서. 그래서 기뻤으니까요.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계속 자기 곁에 있어준다면 다 받아들여 줄 생각도 있었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마을에 정착해 혼자 농사짓고 살면서 문평은 많이 외로웠었거든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문평의 집에 살기 시작한 낯선 사내를 두고 말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문평은 사람 좋게 웃으며 하늘이 제게 준 좋은 인연이라고 대답했어요. 하늘이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사내에게 사내를 인연으로 내린단 말이더냐?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문평의 뒤에서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사내가 너무도 무서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문평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어요.
신랑, 각시라기보다는 어찌보면 신랑이 둘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앞으로도 이렇게 둘이서 농사지으면서 소박하게 살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한 문평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온, 어느 늦은 저녁이었어요.
작디작은 문평의 집 앞에 남자 하나가 문평의 각시님앞에 무릎을 꿇고 뭔가를 애절하게 빌고 있었어요.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거기에 옆구리에는 무시무시한 칼을 차기까지. 혹시 각시님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된 문평이 발걸음을 빨리 해 집 안으로 들어가 각시님 앞에 딱 버티고 섰어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 집의 주인이니 용건이 있으면 내게 말해주십시오.”
“...?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시고 있는 겁니까. 저 사내는...”
“.. 누구긴. 내 신랑님이지. 나 여기서 살림도 차렸다.”
“.. 네? 사부님이 뭘 하셨다고요?”
...... 사부님? 누가 말입니까?
의문을 담은 문평의 두 눈이 각시님을 향하고, 작게 혀를 찬 각시님이 손을 들어 소매를 휘저었어요.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강한 바람에 휘말려 데굴데굴 싸리문 밖까지 굴러가 철퍼덕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떨어졌어요. 어떻게 저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아프겠다. 자기가 당한 것도 아닌데도 전해져오는 아픔에 문평의 눈가가 저절로 찌푸려질 정도였어요.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내가 직접 마영에게 명령까지 내렸거늘. 너희들 집요함은 알아줘야겠구나. 썩 꺼지 거라.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사..사부님... 하지만...”
“... 네 놈이 더 맞고 싶어서 고사를 지내는 구나. 어디 더 맞아 볼 테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꼴사납게 업혀 가면서도 사부님, 제발 돌아와 주십시오! 사부님이 계실 자리는 여기가 아닙니다! 하고 외치는 걸 잊지 않는 남자를 보다 각시님이 매정하게 등을 돌렸어요. 잠시 큰 숨을 여러 번 내쉬다가 그것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부엌에서 소금을 가져와 여기저기 세차게 뿌려대는 각시님을 걱정스레 바라보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어요.
“아마... 앞으로 며칠정도 좀 귀찮게 되겠지만. 그래도 별 일 없을 거니 걱정 마라.”
그럼요. 각시님이 걱정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죠.
저녁을 먹자며 부엌으로 들어가는 각시님을 보다 문평은 아까 남자가 각시님을 사부님이라 부른 것을 떠올렸어요. 저 남자가 우리 돌멩이 각시의 제자인가보다. 아님, 우리 각시가 돌멩이가 아니거나.
-
그리고 다시 다음날.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온 문평은 이번엔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 앞에 짝 다리를 짚고 서 있는 각시님을 보았어요. 무언가 불만이 가득했던 얼굴이 문평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변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쁘장한 남자가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얼굴을 구겼어요. 그리고는 입을 열어 말을 꺼냈어요.
“사부님, 대사형에게는 무력을 쓰셨을지 몰라도 제게는 안 통합니다. 지금 당장 교로 복귀하시지요. 사부님이 계시지 않으니 대사형도 이 사형도, 막내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장로들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고. 교 내 분위기가 엉망진창입니다. 교에는 사부님이 필요합니다.”
어라. 또 각시님을 두고 사부님이라고 불렀어요.
아마 이 남자도 돌멩이의 제자, 아니 각시님의 제자인 것 같았어요.
...... 역시.
각시님의 옆에 선 문평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 영의야.”
“그렇게 부르셔도 저는 안 넘어갑니다.”
“.... 완평이랑 단 둘이 6개월 폐관수련.”
“.......”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안 열어주마.”
“.......”
단둘이 폐관수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게 생긴 남자가 한참을 각시님을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떨궜어요.
문평의 각시님이 잘생긴 얼굴 한 가득 승리의 미소를 지었어요. 아마도 우리가 이긴 것 같았어요.
-
그리고 그 다음날.
이제는 칼과 검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도 놀랍지 않은 문평이 사람들을 헤치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각시님의 맞은편에 서 있던, 선녀처럼 아리땁지만 어딘지 무서워 보이는 여인의 붉은 입술이 재미있다는 듯 곱게 휘어졌어요.
“어머, 사부님. 제게는 어떤 조건을 내실 거죠?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아요.”
“... 그래.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나. 원하는 게 뭐냐?”
“음... 후아주 세병하고...그리고 또..”
“....또??”
“... 이 사형을 삼 개월 동안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한?”
“... 좋다. 네 마음대로 하 거라.”
“사부님의 말씀은 제자 된 도리로 절대 어길 수 없죠.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어.... 이걸 비겼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아리따운 여인이 말한 이 사형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평은 어쩐지 그 사람이 불쌍해졌어요. 저 여인에게 부려지는 걸 본인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아마도 분명 그럴 거 같은데. 하지만, 각시님과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제물로 삼은 거래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헤어지는 모양을 보니 서로에게 대등한 조건으로 비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평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괴로워지는 것도 아닌데 신경 써서 뭐하게요. 머리만 아프죠.
그렇게 한바탕 몰려왔던 사람들이 물러가고,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즈음 각시님과 단 둘이 남은 문평은 아무래도 저녁밥보다는 각시님과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아 각시님의 손을 잡아끌어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이보세요. 각시님. 문평이 고개를 들어 각시님을 불렀어요.
“.... 뭐냐.”
“거짓말은 안 좋은 겁니다.”
....... 당신, 처음부터 돌멩이 아니었죠?
문평의 말에 각시님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어요. 그걸 진짜로 믿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자기를 속였다고 화를 내기 보다는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 받고자 하는 문평의 태도가 각시님은 귀엽고 사랑스러워졌어요.
내가 신랑 하나는 잘 골랐지.
지나가던 길에 만난 순진한 농부를 한번 골리려다가 그 농부의 각시까지 되어버린 사내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어요.
“내가 돌멩이가 아니면. 이 혼인. 무를 테냐?”
“어차피 정식으로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를 수야 있죠.”
“뭐라??”
“그렇지만!!! 하늘이 주신 인연이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건 있으니. 제가 책임은 지겠습니다.”
저 농사 잘 짓고 산기슭에 작지만 밭도 있어요.
입 하나 더 는다고 굶어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앞으로도 같이 살아요.
자기가 돌멩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자신의 옆에서 사내가 없어지는 게 더 싫은 문평이 그렇게 말하며 각시님을 꼭 껴안았어요. 무서운 남자와 예쁘장한 남자, 그리고 어딘지 무서운 여인의 사부님이어도 좋고 아무데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돌멩이여도 좋으니까. 사내가 이대로 쭉 문평의 각시님으로 옆에 남아주길 바랬어요.
..... 각시님. 그렇게 해줄 거죠?
너른 품안으로 흩어지는 문평의 작은 바람에 각시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안에 가둔 이를 조금 더 꽉 껴안았어요.
외롭고 쓸쓸했던 드디어 문평에게 행복이 찾아왔어요.
문평의 각시님이 알고 보니 돌멩이가 아니라 돌멩이로 사람을 여럿 죽일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것과 마교라는 엄청나게 큰 단체의 교주라는 것. 그리고 처음 이 주일동안 차려진 아침 밥상과 같이 사는 동안 차려졌던 저녁밥을 만든 게 각시님이 아니라 각시님이 데리고 있던 시비였다는 걸. 문평이 알게 된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어요.
........ 그래도 두 사람은 앞으로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