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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秋世印​
千秋夜話​

 

어린 싹은 드디어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세상에 나와 눈을 떴을 때부터 매일 정성스레 물을 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던 아름다운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네요.

 

그래서 그동안 너무너무 궁금했던 것을 가장 먼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어린 싹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소년은 뛸 듯이 기뻐하며 뺨을 붉혔어요.

 

“사람들은 나를 천마라고 부르지.”

 

“천마...”

 

싹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천추세인 합작 동화

 

“어린 왕자”

- 연소저(@ExTuncAmor)

옛날 아주 먼 옛날, 우주의 어느 외딴 별에 천마라고 불리는 소년이 살고 있었어요.

 

그 별에는 소년이 사는 집 한 채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별의 전체 넓이가 천평밖에 되지 않아 걸어서도 금방 한 바퀴를 돌 수 있었지요.

 

소년은 그 별에서 아주 오랫동안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았어요.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아주 가끔 다른 별에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나무 그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었어요.

 

가끔 처음 보는 씨앗이 바람에 실려와 싹을 틔우기도 했어요.

 

하지만 소년의 별은 너무 작았고 함부로 이상한 식물들이 자라 뿌리를 내리고 커다랗게 자라버리면 별이 부서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모르는 싹이 나면 모조리 뽑아버렸어요.

 

소년의 별은 그와 나무만으로 완벽하였기에 다른 무엇도 더 필요하지 않았지요.

* * *

소년이 별에 살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 난 비행기가 소년의 별로 불시착한 일이 있었어요. 다행히도 아주 작은 1인용 경비행기였기 때문에 별은 무사할 수 있었지요. 여느 때처럼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소년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어요.

“이것 봐, 조심하라구. 내 별이 부서질 뻔했잖아.”

“너는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그런 말이...”

비행기에서 기어나오던 조종사는 들려오는 말에 화를 내려다가 말을 삼키고 말았어요. 나무 밑의 소년을 보는 순간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거든요.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알아.”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중얼거린 조종사는 처음 본 아이에게 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란 걸 깨닫고 당황했어요. 하지만 소년은 그런 당연한 말은 왜 하냐는 투였어요.

 

다른 의미로 말문이 막힌 조종사는 화제를 돌렸어요.

 

“와 이 별은 정말 작구나. 이렇게 작은 별은 처음 봤어.”

 

“나 혼자 살기에는 딱 알맞은 크기지.”

 

조종사는 어린 소년이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사는 것이 퍽 안쓰러웠지만 소년의 태도가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너는 어쩌다 이 별에 혼자 살게 된 거니?”

 

“나도 원래는 사람이 많은 커다란 별에서 살았었어.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지. 그래서 나는 열심히 힘을 길렀고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졌어.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다 죽이고 이 별로 이사온 거야.”

 

“??????... 그랬구나;; 그래도 혼자 살면 외롭지 않니?”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동생뿐이었는데 나 때문에 죽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는 혼자 사는 게 좋아.”

조종사가 비행기를 고치는 동안 소년과 조종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의외로 소년은 유쾌하고 대화하기 즐거운 상대였지만 유독 사랑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드디어 비행기를 완전히 수리한 조종사는 소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안녕, 어린 왕자. 아름다운 너에게도 언젠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겼으면 좋겠구나.”

그들이 나눈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말을 –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는 듯 - 남기는 조종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소년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 * *

똑같이 평온한 날들이 지나갔어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소년의 모습은 그대로였고 소년의 일상엔 어떤 변화도 없었어요.

날짜 세기를 그만둔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어느 이른 봄날 아침, 아직은 차가운 새벽 공기에 눈을 뜬 소년은 뭔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아주 오랜만에 꿈에서 동생을 만났거든요.

 

- 형, 오늘은 엄청 좋은 일이 생길 테니 기대해도 좋아!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큰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어요.

 

- 이번엔 진짜야. 두고봐!

그건 동생의 말버릇이었어요. 꽤 나이차이가 났던 동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 매끄러운 돌멩이나 풍뎅이, 개미집 따위를 발견하고는 마치 귀한 보물이라도 찾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곤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잠에서 깬 소년은 동생과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해 아쉬웠지만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했어요.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운정이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는데... 이상하다.’

혹시나 해서 나무에도 올라가보고 집안 구석구석 살폈지만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요. 워낙 작은 별이었기 때문에 별을 한 바퀴 다 돌아도 얼마 걸리지도 않았죠.

괜히 낮잠 시간만 날렸다고 생각한 소년은 금세 보물찾기에 흥미를 잃고 집으로 돌아와 창가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언가를 발견한 건 그때였어요. 평소에는 갈 일이 없던 소년의 작은 집 뒤편, 처마 밑 가장 구석지고 그늘지고 추운 곳에 분명 무언가가 있었어요. 나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처음 보는 풀이었지요.

‘못보던 잡초군. 뽑아야지.’

늘 그래왔듯 아무 생각없이 풀을 뽑으려던 소년은 손을 거두었어요.

‘설마 이건가...’

풀은 싹이 난 지는 한참 되어 보였지만, 볕을 받지 못해 색깔도 옅었고 잎도 몇 개 없이 웃자란 볼품없는 모습이었어요. 이곳저곳 시들어 있고 벌레한테 갉아 먹힌 흔적도 보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이 말한 좋은 일 같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풀을 뽑지 않고 내버려 두었어요.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이 풀 따위가 별을 망가뜨릴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운이 좋은 녀석이군. 양지바른 곳에 싹을 틔웠다면 내가 못보고 지나칠 리 없었을 텐데... 이 별에서 이 정도까지 자란 건 네가 처음이다.”

소년은 가끔 생각날 때마다 창밖으로 풀을 내다 보았어요.

따로 물을 주지도 돌봐 주지도 않았지만 풀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지요.

“정말 못생겼군.”

무언가를 키워본 적이 없는 소년은 볼품없이 자라는 잡초에게 뭔가 심술이 났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어요. 그래도 그저 밤사이 죽지는 않았는지 슬쩍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 * *

소년의 별에 한 달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어요.

끈질기게 버티던 풀도 이 가뭄은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어요.

잎이 바싹 말라 누렇고 검게 변하고 줄기는 땅에 축 늘어져 버렸어요. 어쩌면 벌써 죽은 것 같기도 했어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잡초였잖아...’

 

그래도 자신의 별에서 제 손으로 죽이지 않은 무언가가 죽어나가는 것은 왠지 신경이 쓰였어요.

 

“에잇, 차가 왜 이렇게 미지근해!”

 

창가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차를 마시던 소년은 창밖을 힐끔 보더니 식어버린 차를 창밖으로 휙 뿌려 버렸어요.

 

“입맛만 버렸네.”

그리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지요.

 

다음 날 평소엔 가지도 않던 뒤뜰을 어슬렁거리던 소년은 간신히 몸을 조금 일으키긴 했지만 여전히 시들시들 죽어가는 풀 앞에 쪼그리고 앉았어요.

 

“운만 좋은 줄 알았더니 끈질기기까지 한 녀석이었네.”

 

“무...”

 

너무 작은 목소리라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인가 했어요.

 

“뭐라고?”

“물... 좀...”

“오! 너 말을 할 줄 아는구나. 내가 동물들이랑은 이야기를 많이 해봤는데 너같은 풀이 말을 하는 건 처음...(중략)... 아. 이 별에 있는 큰 나무는 말을 할 줄은 알아. 근데 1년에 몇 마디 안 해. 그래서 가끔 죽은 건가 싶어서...(중략)... 그 나무는 나이가...”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풀은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올 것처럼 짜증이 났지만 화를 낼 기운도 없어 겨우 다시 입을 떼었어요.

“제발... 물 좀... 주세요...”

 

“운 좋고 끈질긴데다가 엄청 보채는 녀석이군.”

소년은 그제서야 집으로 들어가 물을 한 잔 담아와 풀에게 주었어요. 고작 물 한 잔이었지만 풀은 금방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에 진심을 전하며 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요. 전에도 이리저리 거니는 소년의 모습을 가끔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지요. 자신을 신기한 무언가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바라보는 두 눈이 밤하늘의 별이라도 박아놓은 듯했어요. 순간 뭔가 하늘 위를 나는 것도 같고 꿈을 꾸는 것도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자신의 얼굴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는 풀을 바라보던 소년은 짓궂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무도 없는 별에 혼자 수십 년간 살다보니 지루해지던 참이기도 했구요.

“흠. 너는 나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이제부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

미소를 지으며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소년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답고 해맑기만 했어요. 그 천진한 미모와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풀은 소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뒤늦게 깨닫고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네? 무엇을 말입니까?”

“그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겠지.”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진 풀은 무엇을 시킬지 몰라 두려운 마음에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어떤 종류의 풀인지도 모르겠구요.”

“운 좋고 끈질기고 보채는데 멍청하기까지 한 놈이군. 걱정할 것 없다. 네가 무엇을 할 줄 아는지는 내가 알아낼 테니.”

분명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인데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 * *

소년은 풀에게 장난치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무섭게 생긴 벌레를 잔뜩 잡아다가 근처에 풀어놓기도 하고 강아지풀을 뜯어서 풀의 온몸을 간지럽히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소리를 내지 말라거나 움직이지 마라, 떨지 마라는 등의 주문이 추가되었지요.

심심하다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지 않나 춤을 춰보라지 않나 갈수록 이상한 것들을 시키는 소년이었어요.

게다가 비실비실한 것이 못생겼다, 색깔이 왜 그 모양이냐, 잎은 나다 만 것이냐고 놀리고, 무엇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구박하는 것은 입버릇이었어요.

풀은 억울했어요. 죽기 직전 물 한 모금 받아먹은 것이 무엇이 그렇게 큰 잘못이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처음에는 진심으로 무서워 소리도 지르고 벌벌 떨기도 하고 소년의 놀림에 상처를 받아 울기 일쑤였어요. 나는 왜 이리 못나고 무능한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내다 보니 소년이 정말 자신을 해칠 마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소년이 한껏 신난 표정으로 새로 발견한 신기한 벌레라며 데리고 온 무시무시한 괴물이 진짜로 풀의 잎사귀를 갉아먹으려 하자 망설임 없이 낚아채 죽여버린 적도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는 여전히 소년의 장난이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겠구나, 그거면 됐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가끔은 소년의 노림수가 뻔히 보였지만 또다른 방식으로 괴롭혀지는 것이 싫어 일부러 무서운 척 하기도 하며 점점 익숙해져 갔습니다.

작은 별에 봄비가 내렸어요. 풀이 자리잡은 곳은 소년의 작은 집 처마 밑이라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며칠째 햇빛을 보지 못한 풀은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으슬으슬 춥기도 했구요.

“비도 오고 울적하니 노래를 한 번 불러보아라.”

창가에 앉아 그런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난데없이 이런 말을 했어요.

“제가 태어나서 노래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가르쳐 주시면 배워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춥고 기운도 없는데 이제 하다하다 별 것을 다 시킨다며 궁시렁대던 풀은 소년이 절대 노래 따위는 부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렇게 대꾸했어요. 많이 대범해졌네요.

“하하하.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내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어찌 알았느냐.”

하지만 소년은 뾰로통한 풀의 대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웃은 뒤 뜻밖에도 나지막이 노래하기 시작했어요.

풍류로운 모습을 생각해 보면

여러 모로 아름다웠네.

당시에 너무 쉽게 헤어진 것이 한스러워

향기로운 종이에 사모하는 뜻을 적으려 하네.

그리워하는 눈물이 향기로운 종이에 적힌 글자를 적시는데

색칠한 대청은 깊고

은빛 촛불은 어둡고

겹문은 닫혔네.

당시와 같은 즐거움을 언제나 이루랴?

빨리 서로 만나 다시 맹세하기를 바라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때를 가볍게 버리지 말라.

원앙(鴛鴦)을 장식한 장막 안에는 원앙을 수놓은 이불이 있고

원앙을 새긴 베개 위에는 원과 앙이 함께 자리.

그와 같이

길이 그렇게

천년을 살았으면.

소년은 무엇이든 못하는 것이 없었지만 노래까지 잘할 줄은 몰랐던 풀은 그저 넋을 잃고 듣기만 할 뿐이었어요. 아직 어린 풀이 이해하기에 노랫말은 너무 어려웠어요. 그리고 소년의 낮은 목소리와 어딘지 그리워 보이는 눈빛은 처음 보고 듣는 낯선 것이었지요.

“거기까진 빗물이 들이치지 않을 텐데. 처마에 구멍이 났나.”

어느새 평소의 장난기 어린 소년으로 돌아간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 풀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어요. 급히 눈물을 닦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는 이유도 알지 못했지요. 지금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문득 이 작은 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소년이 가엾다는 생각이 스친 것도 같았어요.

“자 이제 약속대로 노래를 해보거라.”

“...”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비가 그치질 않았어요.

 

“비가 와서 벌레를 잡으러 갈 수도 없고...”

 

그날 이후 소년은 이렇다 할 장난을 치지 않았어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더듬더듬 노래하는 풀을 실컷 놀려주긴 했지만 그뿐이었지요.

 

대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이야기, 다른 별에서 만난 신기한 사람들, 놀라운 풍경들, 뜬금없는 웃긴 이야기... 소년의 이야기보따리는 소년 자신만큼이나 다양하고 신비한 매력으로 가득 차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저 사람이 또 무슨 이상한 걸 시키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경계하던 풀도 점점 소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가끔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어요. 처음으로 풀이 웃는 모습을 본 소년은 더욱 흥이 나 이야기를 이어갔지요.

 

햇빛을 보지 못해 춥고 우울하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어요.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이 돌아오자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장난을 치기 시작했지만 훨씬 말수가 늘었고 알게 모르게 다정해졌어요.

풀이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은 꼬박꼬박 물을 주었고 바람이 세찬 날은 가림막도 세워주었죠. 특히 비가 오는 날 힘들어하는 풀을 위해 더 재미난 이야기로 웃게 해주었고, 빗물이 고이거나 뿌리가 드러나지 않게 흙도 세심하게 살펴 주었어요.

풀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았어요. 소년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 그가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졌어요. 풀의 용기를 낸 질문에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천마라는 것과 왜 이 별에 혼자 살게 되었는지, 고향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솔직히 대답해 주었어요.

이제 풀은 소년이 늦는 아침이면 그를 기다리게 되었고 그와 함께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날이 저물었어요. 가끔 소년이 다른 별로 며칠씩 여행을 떠나면 혼자 남은 풀은 심심하고 외로웠어요. 하루 종일 소년에 대한 생각뿐이었지요.

그럴 때면 근처를 기어다니는 개미나 가끔 보이는 다람쥐, 밤하늘의 별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어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보려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소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재미있는지, 얼마나 짓궂고 얼마나 다정한지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아 개미도 다람쥐도 별들도 그다지 친해지고 싶어하지는 않는 눈치였어요. 풀만 모르고 있었지만요.

며칠 만에 돌아온 소년의 모습에 왠지 가슴이 뛰었던 것까진 반가움 때문이라 이해해 보려 했지만, 밤이 되어 소년이 자러가는 것이 뭔가 아쉽다고 느껴지자 풀은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 * *

유난히 햇살이 따사로운 아침이었어요.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 한낮에는 덥다고 느껴지는 늦봄, 초여름 무렵이었어요.

오늘은 풀에게 어떤 장난을 칠까 궁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년은 뒤뜰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처음 보는 붉은 꽃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거든요. 혹시 잘못 본 것인가, 밤새 어디서 싹이 돋아나 꽃이 핀 것인가 확인해 보았지만, 늘 보던 못생긴 풀이 맞았어요.

“...”

“안녕...하세요.”

“...”

항상 먼저 다가와 말을 걸거나 깜짝 놀래키던 소년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자 풀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년은 여전히 말이 없네요.

한참을 말이 없던 소년이 내뱉듯 물었어요.

“왜 진작 네가 이런 꽃을 피운다고 말하지 않았지?”

“저도... 몰랐으니까요...?”

화를 내는 것도 같고 원망을 하는 것도 같은 소년의 얼굴이 낯설었어요. 꽃을 싫어하는 것인가 싶어 덜컥 겁이 났어요.

뭐라고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뒷모습으로 보이는 소년의 귀와 목덜미가 꽃의 색깔과 똑같았지요.

다행히도 소년은 화가 났던 것은 아닌지 얼마 후 돌아왔어요. 여전히 꽃과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지만요.

“흠...흠... 네 모습이 갑자기 바뀌어서 다른 놈인 줄 알았다. 앞으로 혹시 또 그런 변신을 할 예정이라면 미리 말을 해주길 바란다.”

“그런 걸 미리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여유롭기만 하던 소년이 어딘지 모르게 당황해하는 모습이 좋았던 꽃은 혹시 앞으로 그런 일을 미리 알게 된다 하더라도 절대 알려주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바뀐 꽃의 모습에 적응을 하였는지 소년도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지요.

우선 벌레를 잡아와서 괴롭히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게 되었어요. 대신 귀찮게 꼬이는 해충들을 모조리 잡아주었고, 꽃의 향기에 자연스럽게 날아드는 나비와 벌들마저 눈에 띄는 대로 내쫓아버렸지요.

정원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던 뒤뜰에 튼튼한 울타리를 세우고 꿀이라는 것을 먹여주기도 했어요. 난생 처음 맛보는 달콤함에 꽃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어요.

툭툭 건드리고 간지럽히며 괴롭히던 손길도 무언가 달라졌어요.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바라보고 입을 맞추었지요. 그럴 때마다 꽃은 붉은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오르고 기분이 이상해졌어요.

그리고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뜨거운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둘은 그렇게 서로만을 바라보며 웃고 행복했어요. 이제 서로가 없는 하루를 상상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답니다.

* * *

별의 유일한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둘은 서로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곽효라는 이름의 부엉이가 별을 찾아왔어요. 그 어떤 일에도 화를 내는 일이 없던 소년이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냈어요. 고향별에서 소년을 공격하려다 실패하여 죽은 줄로만 알았던 곽효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다가 복수를 위해 소년을 찾아온 것이었어요.

하늘에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았던 곽효는 소년이 꽃을 아낀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어요. 그대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는 것을 안 곽효는 곧장 꽃의 목숨을 노렸고, 소년은 꽃 앞에서 잔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고향별로 돌아가 싸우자는 곽효의 제안을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들였죠.

“안됩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걱정하지 말거라. 잠시 다른 별에 산책을 다녀온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날 믿지 못하는 것이냐. 다녀올 때 네가 좋아하는 꿀을 선물로 가져오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창백해진 꽃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소년은 그렇게 부엉이와 함께 별을 떠났어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어요. 하지만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꽃은 소년이 너무 걱정되고 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기다렸어요.

어느새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었지만 소년은 오지 않았어요.

소년을 걱정하며 잠 한 숨 자지 못한 꽃은 추위와 함께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요.

꽃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어요. 왠지 죽기 전까지 소년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지나가던 개미와 다람쥐, 별들조차 꽃에게 염려의 말을 한 마디씩 건넬 정도로 꽃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니?”

* * *

소년은 마음이 급했어요.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별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비열한 곽효를 얕잡아봐선 안되었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지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후환의 싹을 모조리 잘라내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어요.

 

‘녀석이 화가 많이 났겠는데...꿀 말고 좋은 술도 챙겨 가야 되겠다.’

 

돌아온 소년은 곧바로 꽃을 찾아왔어요.

 

‘어떻게 사과해야 화가 풀릴까, 그래도 나를 보면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 사이 꽃은 이미 늙고 병들어 쓰러져 있었어요.

“아가! 이게 무슨 일이냐!!!”

“쿨럭쿨럭...모습이 변하게 되면... 미리 말씀드리기로 했는데... 쿨럭... 죄송해요...”

기침을 하느라 첫 마디를 떼기도 힘들어 하는 꽃의 목소리는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어요.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는 소년은 죽어가면서도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는 꽃을 끌어안고 눈물만 흘렸어요. 그런 소년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꽃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어요.

“천마님...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마지막으로 당신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름도 없는 잡초인 걸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1년도 못살고 사라지는... 그런 흔하디흔한 잡초요...”

말 한 마디 내뱉는 것도 힘들어 보였지만 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진심을 전달했어요.

“그런 제가 당신을 만나... 감히 사랑...이란 것을 배우고 행복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행운까지...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죽어가는 꽃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해 보였어요. 그 행복한 미소 앞에 소년은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도 가지 말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벼... 별...에게...”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더 있어보였지만 결국 꽃은 눈을 감고 말았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물을 주고 선물로 가져온 꿀과 술도 먹여보았지만 꽃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어요.

말라 바스라지기 시작하는 꽃을 가장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나자 그제야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어요. 소년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어요.

‘사랑... 이게 사랑이라고...’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언젠가 조종사가 들려주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언젠가 너에게도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겼으면 좋겠다던 그 말이 축복이 아닌 저주였던 것일까. 사랑이 이런 것이었다면 차라리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 울부짖던 소년은 즉시 별을 떠났어요. 어디로 향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 * *

소년은 자신의, 아니 꽃의 별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꽃을 잊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별은 너무 작아서 어느 곳에서도 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떠난 발걸음 그대로 여러 별을 정처 없이 방황했어요.

이제 정말 혼자 남은 소년은 늙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어요. 오랜 세월 혼자가 너무나 익숙했지만, 사랑인 줄 몰라 사랑한다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했던, 꽃과 함께 했던 그 짧은 몇 달간의 기억이 외로움으로 사무쳐 왔어요. 그때마다 차라리 나도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지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꽃의 마지막 말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어요.

그러던 중 어느 별에서 그는 여우를 만났어요. 여우는 물었어요.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니?”

“내가 사랑하던 꽃이 죽었어. 꽃은 너무 약하고 일찍 죽어.”

소년은 아무런 감정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은 텅 빈 모습이었지요.

“아... 꽃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일찍 죽지. 그걸 몰랐었다니 참 안됐구나.”

“...”

“하지만 꽃은 죽어도 씨앗을 남긴단다. 꽃의 씨앗을 찾아서 다시 심으면 네가 사랑했던 꽃을 다시 만날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꽃의 씨앗을 찾기 위해 전 우주를 여행했어요. 갈 수 있는 모든 별에 들러 만나는 이들마다 묻고 비슷한 꽃이나 씨앗은 모두 뒤져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절망보다 못한, 포기할 수 없는 희망만을 남긴 10여년의 여행 끝에 소년은 다시 자신들의 별로 돌아왔지만 소년과 꽃이 사랑했던 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어요. 돌보는 사람이 없던 별은 알 수 없는 풀과 나무가 어지러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어요.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어 더 황량해 보였어요.

그 중 어느 것도 꽃이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한 소년은 그 모두를 베고 불에 태워 버렸어요. 불길은 소년이 좋아했던 커다란 나무마저 삼켜버렸지만 상관없었어요. 불길이 더 번져 이 별 자체를 태워버린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때마침 내린 비로 불길은 잡혔지만 남은 건 잿더미뿐이었습니다.

점점 지치고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해 잠 못 이루는 어느 날 밤이었어요. 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어요.

“이게 얼마만이야, 하나도 안 변했네.”

하나도 반갑지 않았고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시끄러워.”

“어딜 갔다 이제서야 돌아왔지? 엄청 기다리고 있었는데. 위험하게 불은 도대체 왜 지른 거야?”

“닥쳐.”

“그래? 흠... 예전에 여기 살던 꽃이 너에게 꼭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지?”

“아니 뭐 별건 아니...”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 놈의 별 전체를 박살내 버리겠다.”

“허... 10년 전 약속을 잊지 않은 은혜도 모르는 놈이군. 내 죽어가던 그 녀석이 안타까워 알려주기는 하겠다만 그 녀석도 어쩌다 저런 놈과... 쯧쯧...”

별은 북쪽 끝에 있는 동굴 속 바위 밑을 살펴보라고만 한 뒤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한 걸음에 동굴을 찾아가 바위 밑을 살펴보니 과연 씨앗이 하나 숨겨져 있었어요.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소년은 이것이 꽃의 씨앗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지요.

소년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침착하고자 애쓰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주먹에 꼭 쥐고 돌아왔어요.

- 혹시라도 씨앗을 찾게 되면 반드시 봄에 심도록 해. 섣불리 겨울에 심었다가는 씨앗이 습기를 먹고 썩거나 두더지에게 먹혀버릴 수도 있어. 따뜻하고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심고 물을 주면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가장 따뜻한 봄에 만개하지.

당장이라도 씨앗을 심고 싶었지만 아직은 날씨가 추웠기에 여우가 일러준 대로 봄을 기다렸어요. 그에게 주어진 기적 같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망칠 수는 없었어요.

먼저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 황폐해진 땅을 뒤집어 일구고 꽃을 묻어주었던 바로 그 자리에 돌을 골라내고 울타리를 세워 미리 정원을 꾸며 두었어요. 준비는 모두 끝났지만 하나밖에 없는 씨앗을 혹시라도 도둑맞을까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드디어 봄이 되었어요. 소년은 준비된 정원에 조심스럽게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어요.

‘10년이나 지났는데 싹이 날까... 겉으론 괜찮아 보이지만 혹시 불길에 안이 상한 것은 아닐까...’

꽃은 남겨진 자신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10년간 어리석은 짓만 반복했다는 것이 미칠 듯 후회되었어요.

하루, 이틀, 사흘, 이러다 초조함에 말라죽겠다 싶어졌을 때쯤, 드디어 처음 보는 싹이 났어요. 소년은 꽃의 아기 시절은 본 적이 없어요.

소년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어요. 어린 싹이 놀라면 안 되니까요.

“안녕, 내 잡초. 내 아가.”

* * *

어린 싹은 드디어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세상에 나와 눈을 떴을 때부터 매일 정성스레 물을 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던 아름다운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네요.

그래서 그동안 너무너무 궁금했던 것을 가장 먼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어린 싹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소년은 뛸 듯이 기뻐하며 뺨을 붉혔어요.

“사람들은 나를 천마라고 부르지.”

“천마...”

싹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 * *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우신가요? 왕자님 같아요.”

“이 별에는 왕이 없으니 왕자는 아닌데... 네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어린 싹은 꽃과 달리 수다스럽고 밝고 명랑했어요. 아마도 꽃도 어린 시절 추운 그늘에서 혼자 힘들게 자라지 않았다면 이처럼 밝은 아이였을 거라고 생각하자 소년은 미안해졌어요. 사실 꽃을 생각하면 모든 게 미안했지요.

싹은 곧 튼튼한 풀로 자라났고 어느새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워냈어요.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년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어요. 매일 다정하게 보살피고 사랑한다 속삭이고 입맞추고 어루만져 주었어요. 꽃도 그런 소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천마님은 나이가 몇이세요?”

“네가 보기엔 몇 살일 것 같으냐?”

“음... 한 12살? 13살? 15살은 안 넘을 것 같고...”

“하하하. 내가 그렇게 어려보이더냐. 글쎄...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 살았는데.”

“또 저를 놀리시려구... 말도 안 되잖아요. 이렇게 어린 모습인데!”

“고향을 떠나 어느 별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활짝 핀 꽃을 보고는 갑자기 몸이 어려져 버렸지. 그 이후로는 쭉 이 모습이었다.”

꽃은 어쩐지 속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꽃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어요.

“아, 그 때도 꽃을 좋아하셨군요? 하긴 그렇게 오래 사셨으니 얼마나 많은 꽃을 만나셨겠어요.”

“아무리 많은 꽃을 만났어도 내가 사랑한 꽃은 너뿐인데.”

소년의 아무렇지도 않은 고백에 꽃은 얼굴에 열이 잔뜩 올랐지만 괜찮은 척 말을 돌렸어요.

“뭐... 어쩐지... 어린아이 치고는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맨날 뒷짐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어차피 너는 한 살인데 내가 12살이든 120살이든 무엇이 다르겠느냐.”

“(기분이 다르거든요 기분이!!) 꽃이랑 사람이랑 같냐구요. 저도 사람으로 치면 벌써 30은 넘었을 거라구요.”

“그래서 지금 네가 늙었다고 자랑하는 것이냐.”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져주지 ㅡㅡ^) 제가 감히 할아버지 앞에서 어찌 나이를 자랑하겠습니까.”

“하하하하”

너무나 귀여운 꽃이었어요.

* * *

또 다른 해의 봄에 태어난 또 다른 싹도 있었죠. 살짝 자존감이 낮아보여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난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거야.”

싹은 소년의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자기는 너무 작고 볼품없었지만 소년은 힘도 세고 무엇이든 다 잘하고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이 왜 저 같은 잡초를 사랑하시나요?”

소년은 그런 싹조차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어요.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너는 이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 테니.”

천 번의 봄, 천 송이의 꽃.

시간은 흘렀고 조금도 늙지 않은 소년은 수많은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웠어요.

소년의 생에 비해 꽃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소년은 온 힘을 다해 꽃을 사랑해 주었고, 매년 봄 새로 태어난 싹은 조금씩 성격은 달랐지만 매번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소년의 사랑에 진심으로 화답해 주었어요.

그들의 봄과 여름, 가을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늘 놀랍도록 새롭고 가슴 벅찬 행복으로 가득했어요.

소년은 꽃을 화분에 옮겨 이곳저곳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어요. 자신도 처음 가보는 별에 들러 처음 맛보는 진귀한 꿀과 차와 술을 꽃에게 먹이는 것이 소년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요.

그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술에 취한 꽃이 새로 친구를 사귀었다며 윤승효라는 촉새 같은 놈과 시시덕거리는 꼴을 보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 버린 적도 있었지만요.

꽃의 짧은 생이 마감되고 꽃이 남긴 씨앗을 고이 간직하며 쓸쓸이 견뎌야 하는 겨울은 너무나 길고 고통스러웠지만 곧 꽃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만했어요.

다만 이 모든 행복했던 기억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상처로 쌓여만 갔죠. 새로 만날 꽃과 새롭게 사랑하게 되겠지만 떠나보낸 모든 꽃들과의 추억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혼자만의 몫이었어요.

* * *

가을이 되었어요. 또다시 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말았어요.

“겨울은 어떤 느낌인가요?”

“춥고 길지. 심심하고 외로워.”

“제가 떠나면 당신은 혼자가 되나요?”

“응.”

꽃은 오래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을 꺼내었어요.

“... 저는 몇 번째 꽃인가요?”

“...”

“천마님, 나의 왕자님. 제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죠?”

“그랬지.”

“윤승효에게 들었는데 우리별에 날아오는 씨앗들 중에는 겨울에도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꽃도 있대요. 몇 백 년씩 살면서 매년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구요.”

“...”

“다음에는 그 꽃 씨앗을 심으세요.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 다음 봄과 여름에도... 당신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꽃을요.”

꽃은 처음으로 무섭게 화를 내는 소년을 보게 됐어요.

“나는 네 소원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지만 그것만은 들어줄 수가 없다.”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집으로 들어와 버린 소년은 고작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곧 죽게 될 자신보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그 마음이, 그 사랑의 크기가 너무나 커서, 꽃이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랑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음 날부터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어제의 대화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그저 내일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사랑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어김없이 그날은 찾아오고 말았어요.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년에게 이 순간은 여전히 너무나 큰 고통이었지요.

“나의 어린 왕자님. 저는 괜찮아요. 춥고 긴 겨울을 홀로 지낼 당신이 너무 걱정될 뿐이에요.”

“괜찮아. 곧 널 만날 수 있으니까. 너 없는 동안에도 엄청나게 할 일이 많아. 네가 없을 때 운동도 좀 하고 피부 관리도 해야 어린 널 다시 꼬실 수 있을 거 아냐.”

애써 웃어 보이며 농담을 던지는 소년의 두 눈을 한참 바라보다 꽃은 소년에게 입맞추었어요.

“다시 만날 때, 제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야지. 네가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믿을게요.”

“너도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무엇을 말입니까.”

“... 내가 너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었듯 너도 나의 마지막을 함께해다오.”

“그건 제가 부탁드리고 싶던 말입니다. 당신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제가 그 마지막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나도 그때까지 너만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마.”

그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어요. 소년은 꽃이 남긴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기다렸어요.

‘이번에는 어떤 녀석일까.’

성격은 늘 달랐지만 분명 귀엽고 예쁘겠지. 싹이 나면 언제까지 이름도 없이 꽃이나 잡초라고 부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겨우내 고민하며 지어두었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줄 작정입니다.

드디어 싹이 났어요.

“안녕, 석문평. 내 잡초, 내 아가.”

* * *

그 후로도 몇 십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꽃을 떠나보낸 어느 겨울, 소년은 자신의 생이 곧 끝날 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여전히 소년의 몸이었지만 이번 겨울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가을에 꽃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했을 텐데...

그 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어요. 봄이 오려면 아직도 까마득히 많은 날들이 남아 있었어요.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쌓여 있는 눈을 치우고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꽃의 정원에 씨앗을 심었어요.

“약속을 했건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돼서 미안하다. 너에겐 언제나 미안한 일뿐이구나. 곧 봄이 될 테니 땅 속에서 조금만 참고 견디거라. 물을 주고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도 너는 반드시 씩씩하게 싹을 틔워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테니까.”

다음 날 아침, 밤새 두더지가 씨앗을 물고 가버리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정원을 찾은 소년은 자신이 보는 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한겨울의 차갑고 딱딱한 지반을 뚫고 하룻밤 사이에 싹이 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던 거예요.

천마는 여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어요.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에게 여우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죠.

- 혹시라도 씨앗을 찾게 되면 반드시 봄에 심도록 해. 섣불리 겨울에 심었다가는 씨앗이 습기를 먹고 썩거나 두더지에게 먹혀버릴 수도 있어. 따뜻하고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심고 물을 주면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자라 가장 따뜻한 봄에 만개하지.

- 근데 아주 가끔 어떤 꽃은 한겨울에 피기도 해. 계절을 모르고 피었다고 ‘미친 꽃’이라고 부르지.

“광화(狂花)...”

“안녕, 나의 왕자님.”

간신히 꽃망울을 터뜨렸지만 어린 꽃에게 겨울바람은 너무 가혹했어요. 소년은 금방이라도 꽃잎을 떨어뜨릴 것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꽃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어요.

- 하지만 광화는 오래 살지 못해.

“왜 벌써 나왔느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 될 것인데.”

스스로의 삶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마저 잠시 잊은 소년은 그저 추위에 떠는 꽃이 너무나 가여울 뿐이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려구요. 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당신이 없는 봄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지만 꽃은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어요.

- 그럼 일찍 죽는다는 걸 모르고 실수로 피는 건가?

- 아니야. 그것을 알면서도 피는 거야. 광화는 목숨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에만 핀다고 해.

“그래... 고맙다. 약속을 지켜줘서. 그리고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줘서.”

기나긴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하고 서로를 길들인 천마와 문평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작은 별에서 기적처럼 어떠한 후회도 남기지 않은 채 서로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어요.

끝.

​⑴

소설 ‘어린 왕자’를 기본 모티브로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사랑의 듀엣이 부른 ‘꽃과 어린 왕자’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想風流態, 種種般般媚. 恨別離時大容易. 香牋欲寫相思意. 相思淚滴香牋字. 畵堂深, 銀燭暗, 重門閉.

似當日歡娛何日遂. 願早早相逢重設誓. 美景良辰莫輕拌, 鴛鴦帳裏鴛鴦被. 鴛鴦枕上鴛鴦睡. 似恁地. 長恁地. 千秋歲.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천추세 [千秋歲] (국역 고려사: 지, 2011. 10.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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