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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秋世印​
千秋夜話​

시간을 돌아

W. 쵸쵸(@cho1000cho)

 

 

 

 

 

 

 

  “더는 올라갈 곳이 없어….”

 낡은 외투의 주머니 안으로 숨겨두었던 손을 꺼낸다. 혹독한 추위에 산을 오르며 발갛게 튼 뺨을 감싸자 아주 약간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으나, 이내 다시 차가운 바람과 흩날리는 눈발에 손이 얼어붙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다시 주머니 깊이 찔러 넣은 사내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눈으로 뒤덮인 나무와 땅이 전부였다.

  ‘그 산의 정상에 오르면 분명히 있을 것이야.’

 그 누구도 정상에 오른 이 없다는 높고도 높은 산. 오르기 전 필시 중간에 얼어 죽겠구나 싶었으나 사내는 죽지 않고 숨을 가쁘게 내뱉고 있었다.

 한겨울 설산에 올라 복숭아를 구해오라던 사부. ‘예, 예.’ 대답하면서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다른 말 한마디 대꾸하지도 못했다. 말이 사부이고 제자이지 평생을 그저 제집 종처럼 부려먹은 사람이지만, 그렇게라도 길바닥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던 어린 목숨을 거두어 지금껏 먹여주고 재워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하아… 하… 이제 어떡하지?”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복숭아나무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허튼소리는 한 적 없는 사부이지만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며 죽을 각오로 오른 산임에도 복숭아나무를 찾게 되는 건, 올라오는 길에 신기한 일을 여러 번 겪어서이다.

 

 거친 설산을 쉼 없이 반나절 동안 오르자 심하게 허기가 몰려왔다. 집을 나서기 전 작은 봇짐에 챙겨온 주먹밥을 꺼내어 먹었지만 허기를 채우기엔 부족했다. 눈이라도 퍼먹을까 하는 때, 어디선가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니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사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발로 종종걸음을 옮기더니 뒤돌아 사내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라는 건가?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사내는 지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다람쥐가 바지런히 뛰기 시작하더니 그가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려는 듯 두어 번 멈춰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서 다람쥐는 사라지고 두껍게 쌓인 눈밭 위에 난 앙증맞은 발자국만이 남았다. 그 발자국이 난 자리를 따라가니 놀랍게도 초록 덩굴 사이사이 붉은 열매가 맺힌 게 보였다. 춥고 허기가 져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눈을 비비면서 가까이 가서 보니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알이 굵고 토실토실한 산딸기가 잔뜩 열려있었다. 사내는 허겁지겁 산딸기를 따서 입에 욱여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열매는 이 추위에도 얼지 않고 부드럽게 잘 씹혔다. 이에 짓무른 열매와 새콤달콤한 과즙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허기와 갈증을 동시에 해소해주었다.

 

 그렇게 기운을 내 다시 산에 올랐으나 다시 또 금세 지치고만 사내가 주저앉으려 할 때였다. 이번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아까 만났던 다람쥐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앞서 걸었고, 한 번의 신기한 경험을 한 사내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 듯 걸어 토끼를 따라갔다. 역시나 토끼도 어느새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남은 발자국을 따라 가보니 이번에는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흐르는 피가 맑았다. 사내는 외투 안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질긴 멧돼지의 거친 가죽을 벗겨내고 뼈와 살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덩이의 살코기를 얻고 나니 이제는 이것을 어찌 먹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하고 어디선가 빛이 튀었다.

 

 빛이 번쩍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품에 살코기를 안은 채 동굴을 향해서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매우 좁았으나 혼자 몸을 움직이는 데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였다. 살코기를 바닥에 내려둔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 손에 닿는 대로 나뭇가지를 꺾다가 바싹 마른 나뭇잎더미도 발견했는데 마치 누군가 방금 놓아두고 간 것처럼 조금도 젖어있지 않았다.

 

 산도깨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걸까? 이 산에 도깨비가 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어찌 됐든 당장에 배가 고프고 지친 사내는 잘 마른 나뭇잎도 품에 가득 안아 동굴로 돌아가 불을 피웠다. 다행히 불이 잘 붙어 활활 타올라 살코기 두 덩이를 던지듯 넣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고소한 고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익기를 기다렸다가 멀쩡한 나뭇가지로 푹 찍어 꺼내어 뜨거운 고기를 허겁지겁 베어 물어 삼킨 그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불 옆에 누워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그는 남은 고기를 마저 먹어 치우고 동굴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산의 꼭대기까지 걷고 또 걸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가 지칠 때면 다람쥐나 토끼가 나타나 음식이 있는 곳을 알려주고 잠시 쉬어갈 장소까지 안내했다. 그렇게 꼬박 사흘이 걸려서야 도착한 산의 정상.

 

  “혹시나 했는데….”

 산을 오르며 보고 맛본 식물 때문에 사부가 말한 복숭아나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내는 정상 주변을 맴돌며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멀리까지 내다보았으나, 사부가 말하는 복숭아나무는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대로 산을 내려가 사부가 있는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홀로 지낼 곳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그의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하고 몸을 돌리니 눈안개가 거두어지며 그에 감춰져 있던 해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해는 환한 빛으로 아래를 비추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해가 비추는 곳엔 끝없이 높고 넓은 검붉은색의 돌벽이 세워져 있었다. 기이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사내는 한동안 돌벽을 올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벽의 오른쪽 길을 따라 걸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벽을 세운 것일까? 돌벽에는 그 어떤 이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같은 벽을 따라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인가?”

 

 처음으로 돌벽에서 어떤 틈을 발견한 사내가 이게 문이라면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쿠궁! 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꿈쩍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커다란 문이 스르르 열렸다.

 

  “말도 안 돼….”

 그리고 문의 안쪽에는 사내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추위에 하얗게 얼어붙은 속눈썹이 깜박였다. 분명 지금은 한겨울인데 문 안쪽의 공간만은 계절이 늦게 지나는 듯 온통 노랗고 붉은색으로 물든 나무들로 빼곡했다. 거칠게 튼 손등으로 눈을 여러 번 비벼도 색은 바뀌지 않는다. 이대로 산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본 것을 그대로 말하면 믿어줄까? 아니, 분명 사람들은 자신을 미쳤다고 여길 것이다. 사내는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레 돌벽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양쪽으로 빼곡한 나무가 심긴 흙길을 한 오십 보쯤 걷자 또 다른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색과 누런색이 한데 섞인 들판에는 입구의 것과 같은 나무와 하얗고 노랗고 분홍색으로 잎이 어여쁘게 핀 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고 돌다리 아래에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으며, 바깥과 마찬가지로 어딜 둘러보아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

  “여긴 도대체 어디일까…?”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설고 신기하면서 신비로운 공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산만하게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살피며 걷던 사내의 눈에 드는 것이 있었다.

 복숭아…!

  “정말로 있었다니.”

 사내는 느릿느릿 걸어 복숭아나무 앞에 섰다. 눈앞의 복숭아나무는 그간 그가 보았던 나무보다 키가 두 배는 더 컸고 가지고 굵었으며 그 가지에 맺힌 열매 또한 컸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남자 중에서도 손이 제법 큰 편인 사내가 쥔 주먹보다 훨씬 더 컸다. 과장하자면 갓난아이 머리통만 한 복숭아가 커다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향도 어찌나 진한지 머리 위로 훌쩍 매달려있음에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여 콧속에 가득했다. 그렇게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것 같은 나무에 사내도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멀뚱히 있을 때였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복숭아가 스스로 떨어져 준다더냐?”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복숭아나무만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사내가 급히 뒤로 돌며 몸을 물렸다. 그러자 처음 보는 낯선 이가 무표정하면서도 어딘가 옅은 미소를 띤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 누구…십니까?”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남의 공간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놓고서는 말이야.”
  “그, 그건,”
  “아, 알아 알아.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건 아니지. 내가 문을 열어주었으니.”

 이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다고?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커다란 돌문이 열렸을 때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문을 어떻게 열었다는 것일까? 슬쩍 보아도 자신보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남자이지만, 그 돌문을 혼자서 열기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 자리에 없던 사람이 열어주었다는 것은 더 불가능 한 일이다. 어쩌면 사람이 아닌 것일까? 사내가 다소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무리인 것도 아닌 것이, 남자는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아름답고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볼일 많은 사부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혼자 이곳저곳 심부름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고 서양인도 여럿 본 그이지만, 눈앞의 남자만큼의 미모를 가진 사람은 본 적 없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을 셈이야? 턱 빼놓고 있으면 복숭아가 입으로 떨어주기라도 할까?”

 어딘지 사람을 바보 취급 하는 말에 기분이 상한 사내가 급히 입을 다물고 괜히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자 남자는 하하 크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더니 그대로 사내의 곁을 지나 복숭아나무 앞으로 가더니 마치 새가 날 듯이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올라 가장 가까이 닿는 가지에서 커다란 복숭아 하나를 따서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어, 어떻게….”

 사람이 허공에 뜨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도대체가 이 산은 온통 놀랍고 신기한 일투성이다. 어디부터가 진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해 혼란스러운 사내의 눈이 팽글팽글 돌았고 급기야 사실은 산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추위에 얼어 죽었고 사후세계라는 곳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마저 하게 됐다.

  “허튼 생각 그만하고 이거나 받지 그래?”
  “어어!”

 커다란 남자의 손에 쥐어있던 복숭아가 공중에 떴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내밀었고 복숭아는 그의 손 위에 꽉 들어찼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와 색 고운 분홍 복숭아가 어찌나 탐스러운지 사내의 입안에 침이 절로 고였다. 그 침을 꿀꺽 삼키자 남자가 크게 웃으며 손짓했다. 손짓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가까이 다가가 사내 손 위의 복숭아를 집어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댔다.

  “머, 먹으라고요?”
  “그래.”

 아마도 나무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먹으라고 하니 그리해도 괜찮은 거겠지. 그러잖아도 달콤한 향기에 취해 침이 넘어가던 터라 사내는 그대로 입을 벌리고 탐스러운 복숭아의 한 귀퉁이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다!”

 정말이지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너무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적당히 씹는 맛이 좋은 과육과 달콤하면서도 끝에 새콤한 맛이 입안에 감돌다가 시원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과즙이라니. 이런 복숭아는 세상천지 유일하게 이곳에만 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음….”

 오물오물 씹던 과육을 꿀꺽 삼키며 사내는 사부가 복숭아를 좋아했던가? 라는 생각 따위를 했다. 어디선가 이 산의 비밀스러운 곳에서 한겨울에도 가장 맛있는 복숭아가 자란다는 소문을 들은 게 아니고서야, 보통의 복숭아에 비해 특출나게 맛있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것을 구해오라고 한 데에는 별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자, 마저 먹거라.”

 사내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사내의 손에 둥글게 잇자국이 난 복숭아를 쥐여주곤 다시 복숭아나무로 가서 열매 하나를 더 따가지고 왔다.

  “가져가거라.”
  “예…?”
  “이것을 가지러 온 것, 아니더냐?”

 아니, 그것이 맞긴 한데. 그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아는 거지? 사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기는.” 하며 웃는 낯으로 타박했다.

  “다음에 올 때는 네 이름을 말하거라.”
  “다음이라뇨…? 그리고 이름이요…?”
  “그래, 이름. 저 왔습니다, 하면 문이 열릴 거란 말이다. 참, 이름이 어떻게 되지?”
  “석…문평인데요.”
  “…부르기 좋은 이름이구나, 문평.”

 문평, 하고 부르는 말이 어딘지 참 듣기 다정하다고 느끼며 그가 눈꺼풀을 한번 깜빡 움직이는 동안 남자의 웃는 얼굴은 사라졌다. 어느새 사내, 문평은 제 손에 커다란 복숭아를 쥔 채 산 아래에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혹 그 남자가 산도깨비였던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게 가능한 일이냐는 말이다. 어쨌든 문평은 마침 산 아랫길을 지나던 여인에게서 이 계절에 복숭아가 어디서 났느냐는 물음을 듣고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설산의 꼭대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는 이내 걸음을 서둘러 사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은 이럴 줄 알았던 건가?”

 문평은 사부와 설산의 신비로운 곳에서 만난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떠올렸다. 자신이 구해온 복숭아를 보자 탐욕으로 물들던 사부의 흉흉한 눈동자와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부드러운 남자의 눈매는 몹시 상반되었다. 아무튼, 사부는 며칠 뒤 문평에게 또 한 번 같은 곳을 찾아가 이번에는 샘물을 한 병 떠오라고 시켰다. 어찌 그 험한 산을 다시 오르느냐고 슬쩍 대꾸했으나 역시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부의 재촉에 문평은 작은 봇짐을 꾸려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리고 산 아래 당도했을 때 눈길 위에 찍힌 짐승의 발자국이 눈에 띄었다. 사슴인가? 먼저 산에 올랐을 때 만났던 다람쥐와 토끼가 떠오른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고 발자국은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서 끊겨 있었는데, 그 앞에는 키 큰 나무가 빽빽이 심겨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문평이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안으로 몇 걸음 더 걸어 들어가자 산꼭대기에서 본 것과 똑같은 돌문이 보였다.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남자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 올 때는 네 이름을 말하거라.’
  ‘부르기 좋은 이름이구나, 문평.’

 

 생전 처음 들어봤던 말에 이제서 두 뺨이 부끄럽게 달아올랐다. 문평은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손바닥을 가져다 대어 식히며 그 남자는 자신이 다시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누가 보면 비웃을까 싶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휙휙 돌려 살피고는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돌문에 대고 외쳤다.

 

  “저, 저 왔습니다. 석문평…이요. 문을 열어주세요.”

 

 그러자 지난번처럼 쿠궁,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문이 열렸고 산꼭대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풍경이 문평의 눈앞에 펼쳐졌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 안쪽에 남자가 서 있었다는 것 정도.

 

  “아,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안녕했다.”

 

 인사를 받은 뒤 염치없지만 이번에는 물을 한 병 얻으러 왔다고 말하려 입을 떼려다가 손을 잡아오는 남자의 행동에 놀란 문평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낮게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말없이 풀길 위를 걸었다. 그렇게 문평이 남자에게 손을 꼭 잡힌 채 도착한 곳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놓인 넓은 평상 앞이었다. 사방으로 길게 뻗은 굵은 가지마다 맺힌 잎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어느 귀한 집의 정자보다도 훌륭했다.

 

  “그렇게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앉지?”

 

 먼저 평상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남자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도대체 저 사람이 나랑 뭐 하자는 것인가 싶은 문평은 어쨌든 그가 시키는 대로 평상에 올라가 우물쭈물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은은한 나무 냄새에 기분이 좋아진 문평이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고, 남자는 그 미소를 제 깊은 눈동자에 눌러 담았다.

 

  “술, 좋아하나?”
  “예? 예….”

 

 사부가 시킨 고된 일을 마친 뒤 아무 주막을 찾아 마시는 싸구려 술도 입에 잘 맞는 문평이다.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평상에 놓여있던 하얀 병을 들어 입구에 꼭 맞물려있던 나무뚜껑을 땄다. 그러자 아주 달큰하면서도 톡 쏘는 향이 퍼져 나왔다.

 

  “복숭아…인가요?”
  “그래. 전에 네가 맛본 그 복숭아로 담근 술이지.”

 

 그냥 먹어도 너무나 맛있던 복숭아. 그 복숭아로 담근 술이라는 말에 문평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설마 저 술을 혼자 마시려고 꺼낸 건 아니겠지? 에이, 그리 야박한 사람은 아닐 거야. 이 겨울에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복숭아를 내준 사람인데, 설마. 혼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문평의 앞에 잔이 놓이고 이내 술병에서 투명한 술이 졸졸 흘러나왔다. 손짓으로 먼저 마시라 권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문평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어쩌다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었는지, 사부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하며 콧속에 흠뻑 향을 적신 뒤 입술을 벌리고 그 사이로 술을 흘려보내 입안에 잠시 머금었다가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이건 천상의 맛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런 맛이다.

 

  “한잔 더 하겠나?”

 

 좋은 술 앞에 문평은 염치고, 사부의 심부름이고 몽땅 날린 채 남자가 따라주는 술을 한잔 더 받아 삼켰다. 내가 언제 또 요 귀한 술을 맛보겠느냔 말이지. 두 번째 잔을 비운 문평의 잇새로 크으, 하는 감탄이 새어 나왔다.

 

  “안주도 같이 들지 그래.”

 

 어디서도 본적 없는 커다란 나뭇잎 위에는 별다른 양념이나 조리 없이 그냥 물에 푹 삶은 듯한 오리 한 마리가 놓여 있어 그러지 않아도 문평이 힐끔힐끔 바라보던 터였다. 그는 남자가 권하는 커다란 오리 다리 한쪽을 받아 한입 뜯어 먹었고 입에서 살살 녹는 살코기에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주홍빛 노을 진 하늘이 문평을 반기고 있었다.

 

  “깼나.”

 

 그새 익숙해진 나지막한, 어딘지 다정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째서 풍경이 삐딱하게 보이는 것인지 가만히 생각하던 문평이 소스라치게 놀라 퍼드덕 몸을 일으켰다. 미쳤지, 미친 게야. 방금까지도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누워있던 남자의 허벅지를 바라보는 문평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다리 좀 베고 누웠다고 펄쩍 뛰기는.”

 

 그야, 그쪽은 그간 다른 사내한테 다리를 실컷 내줬었나 본데 난 이런 일이 처음이거든요! 하는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지만, 하필 딸꾹질까지 같이 딸려 온다. 이 상황에 딸꾹질까지 하면 가관일 거 같아 흡! 숨을 참으며 괴로워하는데 괜히 얄밉게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다. 달달함 뒤에 훅 올라오는 독한 기운을 알았을 때 적당히 마셨어야 했는데, 혀끝을 황홀하게 감싸는 술맛에 잔을 놓지 못하고 몇 잔이나 넙죽넙죽 받아 마신 결과가 이 꼴이다. 남들이 봤다면 볼썽사납다며 손가락질을 했겠지.

 

  “깨, 깨우셨어야죠.”
  “아기처럼 곤히 잘 자는데 왜 깨우나, 깨우긴.”

 

 아기?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팔뚝과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덕에 딸꾹질이 멈췄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정말 제 아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다시금 다정히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어쩐지 서운함을 토로하는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에도 술만 마시면 아무 데서나 잠들고 모르는 사내 다리에도 눕고 그러나 보지?”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닌가?”
  “아닙니다!”
  “뭐, 그럼 됐고.”

 

 대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는 문평이 입술 사이로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조금, 아주 조금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가 등 뒤로 내려앉는 노을의 색과 한데 섞인 남자의 모습을 보고는 금세 순한 송아지처럼 눈을 둥글게 했다. 정말이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미인(美人) 아니, 단순히 미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람. 자신이 배운 단어에서는 도저히 눈앞의 남자에게 딱 맞는 표현을 찾기 힘들었다. 아프도록 눈부시고 뜨거운 태양과도 같은 사람. 그것이 문평이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였다.

 

  “침 떨어지겠어.”

 

 그 말에 잠시 놓고 있던 넋을 찾은 문평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는 동안 남자는 다른 말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문평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제법 오래 걸어 닿은 곳에는 넓은 들판 가운데에 우물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는데 남자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보니 얼마나 깊이 파인 우물인지, 물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컴컴하기만 했다.

 

  “챙겨온 병을 다오.”
  “병이요?”
  “그래. 물을 얻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말했었던가? 문평은 아마도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 그에게 이곳을 찾은 목적을 말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곧 순순히 봇짐에서 병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 병을 우물 안으로 던졌고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서야 퐁당 하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는 남자가 우물 안을 향해 손짓하자 잠시 후 병이 두둥실 우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런 게 어찌 가능하답니까?”
  “신기한가?”

 

 신기하다는 말이 재미있다는 말처럼 들렸는지 남자는 병을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둥실둥실 공중에 띄워 문평의 손에 닿게 해주었다. 마치 아이와 놀아주는 것 같은 행동에 결국, 문평은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남자에게서 물을 얻은 문평은 오늘은 왜인지 아쉬운 마음에 무거운 걸음을 천천히 옮겨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사부에게 물을 전하자 이번에는 푸른 나뭇잎을 구해오라 말했다. 푸른 잎이야 그곳에는 흔한 것이니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당최 제게 속내 모를 일을 시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윗사람이 시키면 아랫사람은 그저 따라야 한다. 문평은 사부가 시키는 대로 푸른 나뭇잎을 구하기 위해 산에 올랐다. 이번에는 다람쥐도 토끼도 보이지 않았고 눈길 위에 발자국의 흔적도 없었지만, 문평은 헤매지 않고 빠르게 돌문을 찾았다.

 

 문평이 돌문 앞에 서서 제 이름을 말하자마자 문이 열렸고 남자가 웃는 낯으로 반겨주었다. 이제는 꽤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안에 들어선 문평은 이번에는 푸른 나뭇잎을 구하러 왔다며 아무거나 하나 주워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으음, 아무거나 주워가면 안 되지.”

 

 그리 말한 남자는 문평의 손을 잡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그 언덕에는 문평의 키보다 작고 가느다란 가지에 듬성듬성 푸른 잎이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심겨있었다. 이 나무는 뭐가 다른 건가? 하며 고개를 갸웃대는 문평을 보며 남자가 가지 하나를 꺾었다. 그러더니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제 팔등에 나뭇가지의 뾰족한 끝으로 주욱 그었다.

 

  “지금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남자의 팔등에 핏방울이 맺힌 것을 보고 매우 놀란 문평이 얼떨결에 손을 뻗어 제 옷자락으로 닦으려 하자 남자가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러더니 잎 한 장을 떼어 가지는 버리고 그 잎을 핏방울 맺힌 팔등 위로 부드럽게 쓸 듯 문질렀고, 잎이 지나가며 핏방울을 닦아낸 자리엔 어떤 흉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 불가능해.”
  “의심이 많은가 봐? 코앞에서 보고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의심이 들죠! 상처를 낫게 해주는 식물이 있다는 건 머리털 나고 한번 들어본 적도 없다.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도대체 누구길래 이런 공간을 존재하게 하고 허공을 걷고 물건을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겁니까?”
  “정체, 정체… 글쎄, 내가 누구일 듯싶으냐?”

 

 나도 나를 잘 모르겠군. 기억이 흐려서 말이야. 남자가 속으로 삼킨 말을 엿들을 능력이 없는 문평은 제 질문을 되려 내가 누구냐며 돌려주는 남자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그나마 답답해하는 문평을 알아주는 것인지 남자는 다른 흥미로운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니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지. 그나저나 문평, 네 주인은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인가 보군.”
  “주인이오? 아… 사부님….”

 

 주인이라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릴 적 그에게 주워져 그 집 잡일부터 사부가 손대기 귀찮아하는 일을 모조리 도맡아 했으니 주인과 시종의 관계가 제대로 된 설명일지도.

 

  “너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자에게서 네가 가져간 것들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느냐?”
  “아니오…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그것들에도 이 식물처럼 특별한 효능이 있거든.”
  “특별한 효능이요? 그게 뭡니까?”
  “네가 지난번 이곳에서 가져간 물에는 피와 기를 정화하여 맑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참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리고 보았다시피 이 잎은 상처 난 곳에 스치듯 닿기만 해도 감쪽같이 낫게 해주지. 네 주인에게도 어떤 상처라도 있는 것이더냐?”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쓰려고 미리 가져오라고 한 것일까? 그나저나 사부는 도대체 이곳의 존재와 이곳에서만 나는 신비한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자신에게 가져오라 시킨 것일까? 왜 직접 가지러 오지는 않은 걸까? 문평의 물음의 꼬리를 잡는 동안 남자는 새 가지 하나를 더 꺾어 내밀었다.

 

  “자, 네 주인에게 가져다주거라.”

 

 


 문평의 사부는 그가 가져온 나뭇가지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문평은 호탕한 웃음소리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참 이질적이라 생각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부의 방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 뒤로 사부는 문평에게 세 번의 심부름을 더 시켰고 세 번째 심부름에서는 직접 가시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답으로 받았다.

 

 남자는 문평이 다시 찾아올 때마다 한 번도 귀찮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늘 웃는 낯으로 반겨주고 굽거나 삶는 게 전부지만 맛만큼은 그 어느 화려한 요리보다 뛰어난 음식을 맛보게 해주었다. 흙을 얻으러 왔던 날,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평상에 걸터앉아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던 문평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곳은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는지 남자 말고 다른 사람은 살고 있지 않은지 등 궁금한 것을 물었다.

 

  “글쎄, 언제부터 살았을까?”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면서도 답을 해주기가 싫은 것인지 헷갈리는 대답이었다. 본인이 살아온 세월도 지내온 공간도 기억이 흐려졌다고만 하니 더 집요하게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어색한 틈을 메우기 위해 대신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왜 그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매번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이곳을 찾아오고 있는지 따위의 시답잖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남자는 귀 기울여 들어주고 좋은 주인은 아니군, 하고 흉보며 웃었다. 그렇게 어느새 문평은 남자와 함께 웃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심부름을 하러 간 날에는 남자에게 손을 잡히는 게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고, 그저… 처음으로 마음이라는 것이 설레어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한번 심으면 식물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 흙이라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상처를 낫게 해주는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흙을 살살 손으로 모으며 문평이 중얼거렸다.

 

  “너는 그 신기하다는 소리가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것이냐?”
  “신기한 걸 신기하다 하지, 뭐라고 합니까?”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꼬박꼬박 말대꾸는 잘하는구나.”
  “저 그렇게 어리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해봤자 내 눈에는 한참 어린애로 보이니 어쩔 수 없다.”

 

 어떻게 대꾸해도 이 남자는 절대 한마디도 져주지 않을 것이다. 문평이 그와의 입씨름을 포기한 채 흙을 담은 주머니를 봇짐에 잘 챙겨 담고 손바닥을 비벼 흙을 탁탁 터는데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손에 병을 든 남자가 문평의 손을 잡아 그 위로 병을 기울였다. 시원한 물이 손바닥 위로 흐르며 흙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끗해진 손바닥을 옷에 싹싹 문질러 닦으며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다른 날과 달랐다. 어딘지 애달픈 눈동자. 왜 애달피 느껴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보였다.

 

 남자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문평을 배웅했다. 느릿느릿 걷는 동안 남자는 문평의 손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잡은 손에 힘을 세게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평은 남자에게 잡힌 손을 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가 힘을 주어올수록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

 

  “문평… 문평. 문평.”
  “어찌 이름을 그리 부르십니까?”
  “전에 말했지 않아. 부르기 좋은 이름이라고.”
  “어디가 부르기 좋습니까? 투박하기만 한걸요.”
  “그래서 싫으냐?”
  “뭐… 좋지는 않으니 굳이 좋다, 싫다 가려야 한다면 싫습니다.”
  “나는 좋구나.”
  “예…?”

 

 나는 좋다는 그 말이 이름이 아닌 나 자신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대단한 착각이겠지.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외모며 뭐며 죄다 훌륭하고 빼어난 것만 가진 사람이 설마 나 같은 걸 좋아한다고 할 리가 없지.

 

  “그리 좋으면 당신께서 문평이란 이름을 가지시면 되겠네요.”

 

 혹여 제 머릿속 생각을 들켜 망신이라도 당할까 봐 일부러 툴툴대고는 어느새 도착한 돌문 앞에서 허리를 꾸벅 숙여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다른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하여 한 걸음을 천천히 뗐지만 등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름… 물어볼걸.”

 

 생각해보니 그를 다섯 번이나 만나고도 이름을 묻지 않았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의 기억은 흐릿해도 자신의 이름 정도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문평은 괜히 입이 써 퉤퉤 뱉는 시늉을 하며 다른 날보다 오래 머물러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산을 서둘러 내려왔다.

 

 


 아무 흙이나 퍼온 것이면 어쩌려고 저리 좋아하는 것일까? 문평은 자신이 가져온 흙을 보고 혀로 핥아 입술이 번들거리는 사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저런 것들을 왜 가져 오라는 것인지 아직도 알 수는 없지만, 남자의 말대로 어떤 욕심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웃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사나워지는 눈매와 온통 탐욕으로 들끓어 속을 들여다보기 힘들어진 눈빛. 이만큼 했으면 어린 시절 거두어준 은혜는 갚은 것 같은데. 더는 사부가 불편해져 이제는 이 집을 떠나야 하나, 문평은 그리 생각했다.

 

 그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사부는 처음으로 문평에게 호화로운 식사와 술을 상으로 내렸다. 이 귀한 것들을 모두 구해와서 기특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문평은 사부의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좋은 말들이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되려 불편했다. 마음 같아서는 탁자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상을 받고 싶지도 않았으나 사부가 권하며 빤히 바라보고 있어 억지로 젓가락을 쥐고 몇몇 음식을 대충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삼켰다. 좋은 기름에 튀기고 비싼 향신료를 발라 굽고 볶아 만든 요리이건만, 문평은 이름 모를 남자가 삶아준 오리고기가 더 맛있다고 생각하며 사부가 손수 넓적한 잔에 가득 따라준 술을 받았다.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던 술과는 다르게 삼키기 싫을 정도로 독한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눈을 찡긋 감은 그 순간, 검은색 위로 애달피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독한 술 한잔에 그새 취한 건가. 문평은 그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지난밤 마신 술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한낮이 되어서야 눈을 떠 방에서 나온 문평은 평소보다 서늘하기까지 한 고요한 기운이 낯설어 마침 지나가던 시종에게 왜 이리 조용한 것이냐 물었다. 그리고 시종에게서 답을 듣고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덮쳐와 그 길로 밖으로 나와 뛰고 또 뛰었다. 그가 있는 설산으로.

 

  ‘새벽 일찍이 모두 산으로 떠나셨어요.’
  ‘사냥이라도 가시는 건지 칼과 활을 차고 나가셨습니다. 화총도 챙기셨고요.’

 

  “헉, 헉… 안돼… 제발….”

 

 온 힘을 다해 쉬지 않고 달려 피투성이 발자국을 남기며 산에 오른 문평은 곳곳이 팬 돌문을 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정말 사부가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온 것일까? 왜?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선뜻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서운 문평은 굳게 닫힌 돌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토해냈다가 삼키고 다시 토해냈다가 삼키고를 반복했지만,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닐 거야. 내가 허튼 상상을 한 거야. 그렇지 석문평? 그래, 그런 거야. 이곳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사부는 금희의 말대로 사냥을 나가신 거야….”

 

 얇은 옷이 눈에 푹 젖어 시린 몸을 부들부들 떨던 문평이 고개를 들고 주먹을 꼭 쥔 채 일어났다. 그리고 발갛게 트고 언 손을 펴 돌문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 왔습니다. 문평이요… 문평이가 왔습니다.”

 

 쿠궁, 소리와 진동과 함께 돌문이 움직였다. 그럼 그렇지! 역시 별일 없었던 거야! 하던 문평은 여느 때 없이 다른 낯선 풍경에 넋을 놓았다. 푸른 들판도 노랗고 붉게 물든 풍성한 잎을 자랑하던 나무는 모두 그 색을 잃고 죽어있었다. 힘차게 날갯짓하여 하늘을 날며 지지배배 노래하는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처음 제게 이 산의 길을 친절히 안내해주었던 다람쥐도 토끼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부터 돌문이 열리면 웃는 얼굴로 반겨주던 그 사람이… 없다.

 

 문평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겨우 힘을 주어 척박한 땅에 걸음을 내디뎠고 입구를 벗어나자 넓은 들판 군데군데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익숙한 복장. 문평이 아는 이들이었다. 죽은 땅이 피로 물들어있다. 보고 있기가 괴로워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부릅뜬 채 가장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어디 계십니까? 제 말이 들리면 대답 좀 해보세요! 소리치며 남자를 찾던 그는 복숭아나무 앞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커다란 나무에 탐스럽게 맺혀있던 분홍 복숭아는 땅으로 곤두박질쳐 무르고 터져있었는데 향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피비린내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문평은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 다른 길로 들어섰고 오래도록 걸은 뒤에야 처음으로 발길이 닿은 곳에서 멈춰 섰다. 이 공간에서 숱하게 신비로운 광경을 보았다. 그런 저를 더 놀라게 할 것은 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얼음 나무. 몸통도 가지도 그 끝에 맺힌 열매도 모두 얼어붙은 모양새의 나무는 보는 문평의 심장을 시리게 했다. 그리고 그 얼음 나무에 눈을 감은 채 등을 기대어 앉은 남자를 보는 문평은 가슴이 저 얼음 나무의 가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파져 와 숨이 가빠졌다. 답답한 숨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주먹으로 퍽퍽 두드리는데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남자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저는, 저는….”
  “이리… 가까이 오거라.”

 

 그토록 찾았던 사람인데. 온몸이 굳은 것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문평은 남자가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그제서 빠르게 뛰어 그에게 다가가 풀썩 주저앉아 몸을 살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도대체 누가, 누가….”

 

 문평은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안다. 알면서도 일부러 누구인지 물었다. 멍청이, 등신, 천치처럼. 스스로 자책하던 문평은 남자의 주변에 피 묻은 채 흐트러진 잎사귀들을 발견했다.

 

  “어, 어디를… 다치셨… 상처를….”
  “음, 아니지. 아니야.”
  “예?”
  “내 상처를 치료한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살아보려 욕심을 부리던 이들의 것이지.”
  “그, 그럼 당신께서는 괜찮으신 건가요?”

 

 문평이 안도하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았는지의 기억이 흐려지는 만큼 곧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러니 문평, 네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네 주인이란 자는 내 털끝에도 닿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어째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원래도 백옥과 같던 낯빛이 왜 허옇게 질려가고 총기가 가득하여 구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왜 그 빛이 흐려지는 것이냐는 말이다.

 

  “왜 그리 우는 것이냐.”
  “아….”

 

 그래. 자신도 모르게 흘리고 있던 눈물에 앞이 흐려 남자가 그리 보이는 것이구나 하여 소매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보지만, 그럴수록 태양 같던 남자는 저 얼음 나무와 같이 하얗게 얼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거, 거기 그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몸이 차지 않습니까….”

 

 남자는 문평이 제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넣고 들어 옮기려고 하는 행동에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문평은 한시가 급한데 웃기나 하는 남자가 야속하였지만, 그 스스로 움직일 의지는 없어 보이니 꾹 참고 팔에 힘을 주었다.

 

  “제발 이러지 마십쇼… 조금만 제게 기대어 주세요. 네?”
  “문평….”
  “….”
  “문평아.”
  “괜한 기운 빼지 마시고 제게 기대…,”
  “내 아가.”

 

 아가? 지금 이 사람이 나더러 아가라고 부른 거야? 어이없는 부름에 헛웃음이 터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겨우 멈추었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아가, 아가. 그 우스운 말이 너무나 아프게 들려 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남자의 몸을 덮치듯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내가 이러고 있으면 이 사람이 더 힘든데. 그런데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건 맞닿은 가슴에서 전해지는 거센 심장의 울림.

 

  “참 이상합니다.”
  “….”
  “누구와 가슴이 맞닿아 있는 건 처음인데.”
  “….”
  “왜 당신에게서 전해지는 울림이 익숙한 걸까요?”
  “문평아.”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예?”
  “예?”

 

 남자는 대답 대신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하는 문평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무리 홀로 오랜 시간을 버티었다 한들 어떻게 이걸 잊고 살았을까?

  “시간이란 참 무서운 것이더구나.”
  “….”
  “감히 내게서 너까지 흐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문평의 정수리에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차갑지만 기분 좋은 말랑말랑한 감촉 뒤로 미지근한 물기가 스민다. 시간, 시간… 나를 흐리게 만든 시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이름…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평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맞췄다.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눈가를 보는 순간 온몸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고통이 느껴졌다. 머리털을 뽑아낸 자리에 가시를 심은 듯 극심한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문평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버텼다.

  “운강, 백운강이라 한다.”
  “운강…?”

 

 순식간이었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아주 깊은 곳에 꽁꽁 묻어 감춰져 있던 기억들이 거센 비에 넘치는 강물처럼 문평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와 구석구석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운강, 운강, 운강.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문평은 남자, 운강의 품에 기댄 채 셀 수 없이 많은 그간의 시간 동안 불러보지 못한 그의 이름을 원 없이 부르고 또 불렀다.

 

  “죄송해요… 저는, 운강….”

 

 백운강은 입안에서 헛도는 말에 끅끅 소리를 참으며 구슬피 우는 연인의 등을 전처럼 다정히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차분히 말했다.

 

  “괜찮다. 나도 이만큼 살아오며 흐릿해진 기억을 너라고 별수 있었겠느냐. 굳이 누군가를 탓하려거든 그것은 내가 될 테지. 너를 다시 만나려 그 오랜 시간을 이제나저제나 홀로 버텨왔거늘, 정작 눈앞에 두고서는 알아보지도 못하다니 말이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내 생을 다 마치기 전에 이리 서로를 만나고 기억했으니 말이다.”

 이 사람은 얼마나 오랜 시간 나를 기다려온 것일까? 나는 몇 번의 새 삶을 부여받고도 어떻게 이 사람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아온 건지. 그는 탓하려거든 본인을 탓하라 말했으나 이는 명백히 자신의 탓이었다. 지금에야 그를 기억해낸 이 현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으나, 달리 도리도 없어 무기력하게 눈물을 쏟아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제겐 무엇을 원망할 자격이 없었다.

 

  “아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겠느냐?”
  “…운강….”

 

 분명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인데도 아주 오래전에도 늘 그리하였듯이 제 하나뿐인 연인을 이 세상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보물을 보듯 다정함이 담뿍 담긴 눈을 하고 온 얼굴에 입을 맞추어준다. 짭조름한 눈물을 핥아 얼룩을 지우고 보기 아프게 짓무른 눈가는 새가 쪼듯 부드러운 입술을 누른다.

 

  “얼마나 이리 해보고 싶었는지 아느냐?”

 

 그 말에 애써 감춘 눈물이 차오른다. 그에게 더는 흉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참으려 입술을 이로 짓누르자 커다란 그의 손이 다가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매만져준다.

 

  “그새 피가 맺혔다. 보다시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나무도 죽었다.”
  “이런 와중에도 저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너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구를 걱정하겠느냐? 나를 걱정하게 하는 건 오직 너밖에 없다 하지 않았어? 내 너 때문에 마음 졸였던 날들을 생각하면….”

 

 잠시만 말없이 눈앞에서 사라져도 안절부절못하고 곳곳을 뒤져 기어이 찾아내어 꼭 안아주던 사람. ‘나는 천마라 한다.’ 이 한마디로 모두를 벌벌 떨게 만들 수 있으면서 마음이 상하거나 괜히 토라져 각방을 쓰자 하는 말을 반쯤은 진심으로 무서워하던 사람. 감히 귀엽다 여겼던 내 정인.

  “무슨 생각을 하기에 웃는 것이냐?”
  “그냥… 지나간 일들이요.”
  “참 다행이야.”
  “예?”
  “너와 내 지난 일들에 지금까지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치도록 좋았던 시간. 그래도 이렇게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속삭이며 애틋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기대고 있던 얼음 나무마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문평은 그의 몸을 안아 제게 기대게 했다. 툭, 툭. 녹은 가지에서 둥그렇고 주먹만 한 얼음덩어리가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문평은 가장 가까이 떨어진 얼음덩어리를 집어 들고 코앞으로 가져와 모양을 살폈고 따뜻한 손바닥의 열에 겉이 온전히 녹고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복숭아였다.

 

  “복숭아…?”
  “어느 해 여름 입맛을 잃고 고생하다가 복숭아를 먹고 나은 적이 있었지. 기억하느냐?”

 

 그의 말에 문평은 천천히 지난 기억 중 하나를 떠올려 밖으로 끄집어냈다. 유달리 더운 여름이었다. 얇은 옷을 걸치고 몸에 좋지 않다며 말리는 그를 밀어내고 차게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셔대기만 하던 나날. 타는 여름에 도통 입맛이 없어 이 음식 저 음식 다 물리다가 란란이 간식이라도 드셔보라며 내어준 탐스러운 복숭아를 먹은 뒤에 입맛이 돌아왔었다.

 

  “유난히 따분하던 어느 날 그때의 네 모습이 떠오르더군. 그래서 여기에 복숭아나무 한 그루를 심어두고 언제고 너를 만나면 먹여주려 상하지 않게 단단히 얼려두었지.”
  “도대체 당신은… 몇 년이나 이 나무를 얼려둔 것입니까? 참나,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내가 원래 잡기에 능하잖아.”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근데 복숭아나무는 이것 말고 저기 밖에도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심겨 있던 나무다.”
  “한번 심으면 영원히 시들지 않게 해주는 흙도 있는데요. 그 흙을 조금 옮겨다가 심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재미가 없지.”

 

 본인 재미있으려고 이런 나무를 만들어내다니. 작게 웃는 소리를 듣고 미소 짓던 그는 문평의 손바닥에 놓인 복숭아를 집어 그대로 정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문평은 그가 먹여주는 복숭아를 야금야금 베어 먹었다.

 

  “맛이 어떠냐? 저 밖에서 먹었던 것보다 단가?”
  “이상합니다.”
  “뭐?”
  “무슨 복숭아가 이리도 짜답니까? 당신은 잡기에는 능해도 농사에는 영 소질이 없으신가 봅니다.”

 

 문평은 투덜대며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감추고 남은 복숭아를 씨앗만 남기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씨앗을 근처에 툭 던져두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온통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이곳은 빛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저 위로 몇 번의 가을이 지나갔는지를 모르겠구나. 우리는 참 많은 시간을 돌아왔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이 돌아오는, 그런 귀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그때는 운강… 제가 먼저 당신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정인의 말에 벅차 기쁜 얼굴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문평은 눈감은 정인을 한동안 애틋이 바라보다가 마음이 평온해졌을 때 조심스레 그를 자리에 바르게 눕혔다. 그러고는 저도 곁에 누워 한겨울 추운 날 파고들 듯 그의 품에 비집고 들어가 눈을 감았고, 얼마가 지나자 두 사람의 모습은 지척에서도 찾을 수 없게 눈안개가 자욱하게 내렸다.

 

 


* * *


  “그래서요?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하늘나라로 갔어요? 다시 만난 건가요? 네? 아버지, 빨리 말씀해주세요.”

 아이의 재촉에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누구를 닮아 이리 성질도 급하고 말도 많은 것인지. 그의 머릿속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낸 또 다른 남자가 책을 정리하며 말을 보탰다.

 

  “그리 인상 쓰실 거 없습니다. 저 아이가 성질이 급하고 말 많은 건 다 당신을 닮아서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쟤는 너를 닮았지.”
  “저는 아버지도 닮았고 아빠도 닮았어요. 그러니 둘이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세요! 빨리요! 너무 궁금하단 말이에요!”

 

 부모가 말씨름을 시작할 거 같으니 선수를 치는 아이를 보며 두 사람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는 그걸 따라 고개를 저으며 혼자 까르르 웃다가 손뼉을 소리 나게 짝! 마주치고는 아버지의 팔뚝을 잡아 흔들며 뒷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궁금해서 이따 밤에 잠도 자지 못할 거 같다며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다. 그 말이 기막힌 남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동화가 다 뻔하지. 그 두 사람도 나중에 만나서 잘 먹고 잘살았다.”
  “엥? 그게 끝이에요? 에이, 시시해. 재미있었는데 이젠 재미없어졌어요.”
  “누가 너 재미있으라고 그 시간을 돌아왔다던?”
  “당신도 참….”

 

 정리하던 책을 내려두고 손가락을 입술에 꾹 눌러 쉿, 쉿! 하는 모습에 남자는 내가 뭘 어쨌는데? 하며 어깨를 으쓱댔다. 그러자 힘껏 눈을 흘겨오는데 그 눈초리마저 어여쁘고 사랑스러워 웃음이 절로 난다.

 

  “웅? 왜 웃으세요?”
  “그 두 사람도 다시 만나 꼭 너 같은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았을 거 같아서.”
  “나 같은 아이요? 그럼 정말 좋은 거잖아요! 해피엔딩!”

 

 아버지가 지어준 결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가 벌떡 일어나 소파 위에서 방방 뛰었다. 그 행동을 못 하게 말리려 책 정리하던 남자가 다가오자 아이에게 동화 이야기를 해주던 남자가 일어나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저대로 날뛰고 놀게 놔둬. 실컷 진을 빼놔야 밤에 얌전히 잘 것 아니야?”
  “예? 아휴, 운강 당신은 정말….”

 

 사람이 너무 솔직해도 좋을 게 없다. 남자가 말도 다 마치지 않고 등을 돌리자 운강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대신 이어 말했다.

 

  “정말 뭐? 정말 좋아한다고?”
  “예, 예.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세인아, 오늘 밤은 아빠랑 같이, 읍!”
  “제발 조용히 해. 어젯밤도 그저께 밤도 옆구리에 끼고 잤지 않아? 오늘은 어림없다, 문평아. 지금부터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성큼성큼 다가와 뒤에서 안아오며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귓가에 속삭여오는 말에 문평은 목덜미부터 허리 아래까지 찌릿찌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언제 어디서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저 성격은 변하지 않겠지. 그리 생각하며 부러 타박하듯 한숨을 삼키면서도 저와 그는 지금껏 그랬듯이 영원히 같을 거라 생각하자 문평의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그 눈물 안에는 마르지 않을 행복이 가득 고였다.

 

  “어째서 자꾸 눈물만 늘어.”

 

 손에 닿는 미지근하고 축축한 감촉에 백운강은 손을 떼고 문평의 앞으로 가 서서 마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눈물이 창피한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려는 문평을 그대로 잡아 세워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하고 뺨에 남은 눈물은 입술로 감추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는 부드러운 혀로 핥았다.

 

  “저 아이가 뭐라고 했지?”
  “무엇을 말입니까?”
  “해피엔딩.”
  “….”
  “우리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고 하지 않아? 해피엔딩이면 웃어야지. 안 그런가?”
  “해피엔딩! 해피엔딩!”

 

 여전히 커다랗고 넓은 소파 위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며 외치는 소리에 문평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네 웃는 얼굴이 얼마큼 어여쁘고 사랑스러운지 너는 모르겠지.”
  “어디 저만 모르겠습니까? 당신 빼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겁니다.”
  “그래야지. 몰라야지.”
  “예?”
  “다른 사람이 그걸 알게 되면 해피엔딩이 아니게 될 것 아니야.”

 상상조차 싫은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백운강을 바라보던 문평은 슬쩍 그의 어깨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아이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아이가 뒤로 몸을 돌려 자신들을 보지 않게 되었을 때 문평은 살짝 까치발을 하고 정인에게 입맞춤한 뒤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도 다른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오래오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겁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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